최종편집 2024-04-23 17:06 (화)
“조선시대 해녀들은 중앙정부의 부역에 울어야 했다”
“조선시대 해녀들은 중앙정부의 부역에 울어야 했다”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1.04.26 09: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 역사 30選] ② 물옷...세계 최초의 직업복이지만 시대 아픔 가득

제주를 표현하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가운데 하나가 ‘해녀’다. 그러나 해녀는 사라지고 있다. 젊은 해녀는 찾기 어려우며, 대부분 60대 이상의 연령대를 가진 이들이 해녀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해녀문화의 등재를 추진중이니 아이러니하다.

기록으로 보면 해녀는 ‘잠수하면서 일을 하는 여성’이라는 뜻의 ‘잠녀(潛女)’로 쓰인다.

하지만 잠녀로 불리는 해녀는 직업으로서 뿐아니라, 임금에게 전복 등을 올려야 하는 존재로서 이중부담을 져왔다.

제주도 해녀들이 언제부터 물질을 해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기록으로 살펴보면 짐작을 할 수 있다. 중국의 역사서를 뒤지면 삼국시대부터 제주에서 나온 전복 등이 수출된 사실이 나온다.

조선시대는 뚜렷하게 물질하는 기록이 등장한다. 세종 25년(1443년) 기건 목사는 차가운 날 전복을 따는 그들의 고통을 보고는 재임기간중 전복을 밥상에 올리지 못하도록 했다.

더욱이 조선시대엔 노동력으로서 제주사람들의 역(役)이 다른 지방에 비해 갑절이나 됐다. 제주여성들의 역할이 중요했음은 물론이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37권 28년(1702년)엔 진상(進上)에 대한 부담을 줄여달라는 건의가 올라갈 정도였다. 여기에 잠녀(潛女)가 등장한다.

“1년동안 관아에 바치는 것이 포작은 20필을 밑돌지 않으며, 잠녀도 7~8이나 돼 한 가족 안에서 부부가 30여필을 바쳐야 한다. 전복 등을 따는 역(役)이 모두 이로부터 나와서 경영된다.”

기록으로 살펴보면 물질을 하는 해녀들의 몫이 무척 중요했음을 읽게 된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옷을 입고 물질을 했을까. 지금은 고무옷을 입고 작업을 하지만 197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제주 해녀들은 ‘물소중이’ 등으로 불리는 물옷을 입고 물질을 했다.

1970년대 초까지 해녀들이 입었던 물옷과 물질도구.

물소중이는 가슴 밑으로 중요 부위를 가리는 옷이었다. 물소중이는 반드시 입어야 하는 옷이었으나, 상체에 걸치는 물적삼이나 머리에 두르는 물수건은 선택이었다. 해녀들이 간직한 물소중이는 최초의 직업복이었으며, 해녀들의 패션감각이 묻어나는 시대의 자화상이었다.

물소중이는 1번 만들면 닳을 때까지 입을 수 있도록 고안됐으며, 신체조건도 구애받지 않는 특이한 옷이다. 해녀들은 불턱에서 몸을 말리면서 저마다의 패션 감각을 얘기하기도 했다. 그래서 문양을 만들어 나름대로 최고의 패션을 지향하려 애썼다.

물소중이는 한쪽 방향으로 트임이 돼 있어 입고 벗기에 편하다. 여미는 매듭단추(모작단추)의 매듭고리는 길게 만들어 체형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임신을 하더라고 입을 수 있는 옷이었다.

물옷을 입은 해녀의 모습은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에도 나와 있다. 제주시 용연에서의 뱃놀이 모습을 그린 ‘병담범주(屛潭泛舟)’에 해녀 모습이 등장한다.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 가운데 '병담범주'. 원안에 물옷을 입고 물질하는 해녀들이 보인다.
위 그림의 원을 확대한 모습.

‘병담범주’ 오른쪽에 용두암이 그려져 있고, 그 밑에 잠녀(潛女)라는 글자가 써 있다. 4~5명에 달하는 해녀들이 물질하는 모습이 ‘병담범주’에 담겨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테왁이 보이고, 해녀들은 물소중이로 보이는 물옷을 입고 물질을 하고 있다.

그런데 탐라순력도를 그린 시점은 숙종 28년이다. 앞서 진상(進上)의 부담을 건의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실린 그 때다.

조선조 제주사람들은 이처럼 이중부담에 울어야 했다. 여성들의 고통은 더 했음이 분명하다. 제주사람들은 그 역(役)을 채우려고 여성들까지 나서서 아등바등해야 했다.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는 바로 그 사실을 알려준다. 이형상 목사는 바닷가에서 자맥질을 하는 해녀들의 모습이 궁금했을 터이고, 그의 지시로 물옷 입은 해녀의 모습이 탐라순력도에 담기지 않았을까.

‘병담범주’는 물질하는 해녀들의 모습이 처음으로 담긴 그림이다. 그런 점에서 역사적으로 가치는 있다. 그렇지만 ‘병담범주’를 뒤집어보면 제주 여성들은 부역을 담당하기 위해 고통을 나날을 보내야 한 반면, 관리들은 용연에서 기녀들을 품에 안고 뱃놀이를 즐기는 게 현실이었다.

<김형훈 기자 / 저작권자 ⓒ 미디어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딥페이크등(영상‧음향‧이미지)을 이용한 선거운동 및 후보자 등에 대한 허위사실공표‧비방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되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삭제 또는 고발될 수 있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