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를 다닐 때 소풍이든 운동회든 학교 행사가 열릴 때면 언제나 비가 내렸다.

전날까지도 맑기만 하던 날씨가 그 날이면 돌변하곤 했다. 우리는 교장선생님이 땅강아지를 죽여서 그런 것이라고들 했다.

올해는 6월 10일부터 장마가 시작된다는 보도가 나왔다. 예년보다 2주일이나 일찍 장마철로 접어든다는 예보였다. 당일에는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다음날 있을 <제주탐방>이 걱정스러울 정도로 밤늦게 까지 폭우가 내리는 것이다.

그런데 날이  밝으면서 비가 뚝 그쳤다. 오후에는 개겠지만 오전에는 비가 내리겠다는 예보였는데 아침부터 조금 흐리기만 했다. <제주탐방>을 주최하는 제주포럼C 사무국의 어느 누구도 땅강아지를 죽인 적이 없나보다. 

평소 해당분야의 전문가들을 초청해 탐방 해설을 부탁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생생한 증언을 듣기 위해 '잃어버린 마을들'의 주민들을 초청했다. 서귀포시 중문동 '베릿내마을' 입구 포구에는 이 지역의 역사를 탐구해온 전직 초등교장 이성무 선생과 이 지역 출신의 제주어 시인 송기남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베릿내마을
 
'성천포(星川浦)'라고도 불리는 '베릿내마을'은 앞으로 바다가 펼쳐져 있고 마을 오른쪽으로는 천제연폭포에서 베릿내를 따라 흘러내린 물이 바다와 만난다. 마을 입구에는 '테우리물'이 있다. 마소를 먹이던 테우리(牧者)들이 마을로 들어오면서 몸을 씻던 샘이다. 테우리물에서 20여m 떨어진 곳에는 어부와 해녀들이 풍성한 수확을 빌던 당, '전신당'이 있다. 요즘도 주변의 어부와 해녀들이 찾아오는 듯 당에는 새로 걸린 지전과 물색이 가득했다.

 

천제연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이 마을 옆을 지나 물이 풍족하고,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바다에는 어족자원이 풍부해서 살기 좋던 마을. 주민들은 농사를 짓기도 하고 어업에 종사하기도 하면서 7백여년을 살아왔다. 깊은 계곡을 끼고 있는 초가 10여호의 작은 마을이어서 주민들은 고부 이씨, 남평 문씨, 원주 원씨 등 다양한 성씨를 가졌지만 이웃집 숟가락이 몇개인지도 다 알고 지내왔다. 평화로운 마을에 개발의 광풍이 불어닥쳤다. 
 
1988년 중문관광단지 2단계 개발과정에서 주민들은 모두 마을을 떠나야 했다. 관광단지에 편입되면서 주민들이 떠나 텅 빈 마을은 가구제조업체인 '윤씨농방'에 팔려 '씨 빌리지'(Sea Village)라는 리조트의 한귀퉁이로 포함됐다. 리모델링을 한 초가집들은 어촌체험 관광사업에 이용됐으나 그 때만 해도 체험관광이 관광객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결국 이 사업은 중단됐고 지금은 초가들이 모두 폐가로 남아있다. 
 
대규모 관광단지 개발에 강제수용된 뒤 관광사업에 쓰이다가 예상대로 돈벌이가 되지 못하자 버림받은 마을. 오순도순 모여 살며 삶을 일구다 이곳에서 쫓겨난 마을 사람들은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지붕이 서로 닿을 듯 가까이 서 있는 초가들과 직경 40~50cm 크기의 타원형 먹돌로 쌓인 돌담만이 마을 길과 우영밭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을 뿐 텅 빈 초가의 모습이 쓸쓸하다.

 

이성무 선생은 이 일대의 마을 이름이 상문, 중문, 하문으로 구분됐던 것으로 미루어 베릿내마을은 하문 지경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지난 1985년에는 마을 주변의 해식동굴에서 석기류 등이 발견돼 이미 석기시대부터 이 지역에 인류가 살았음을 보여준다.
 
조선 고종 대에 대정군수를 지냈던 채구석은 관직을 그만 둔 뒤 중문에 살면서 천제연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을 끌어 5만여평의 논을 조성했다. 보리농사만 짓던 이 지역에서 쌀 농사가 시작된 것이다.

천제연에서 중문 일대의 '논골'까지 이어진 물길은 '논골물'이라고 불렸다. 이후 감귤을 대대적으로 재배하게 되면서 논 농사를 짓지 않게 되자 더 이상 필요없게 된 논골물은 물길을 바꿔 지금은 베릿내 절벽으로 떨어진다.

 

너무 아름다워서 잃어버린 베릿내마을. 사람들은 쫓겨나고 마을은 버림받았지만 아직도 그 아름다움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것이 보는 이들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한담마을
 
제주시 애월읍 곽지리 동쪽 바닷가의 한담리. 한겨울 '바람타는 섬' 제주에 하늬바람이 몰아칠 때도 바람이 들지 않아 따뜻했던 마을. 멸치떼와 자릿돔, 소라와 미역 등 수산물이 풍성한 데다 동풍이 불면 유독 파도가 잔잔하고 바닷물이 맑아 '한담'(漢潭)이라는 이름을 얻은 마을. 22가호가 살던 이 마을에는 사람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다.
 
1980년대 제주도에 개발 바람이 불던 시절. 탤런트 노주현이 이 마을 한복판의 집 한채를 사들여 별장으로 꾸며놓았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외지인들이 외진 어촌마을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 채, 두 채 집들이 팔려나갔다.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김권익(73)씨도 지난 1989년 제주시에 사는 부자 고 아무개씨의 강청에 못 이겨 집을 팔았다.

 

한담마을의 자그마한 집들이 있던 자리에는 2층, 3층 짜리 고급주택들이 들어섰다. 25호가 있던 마을이 외지인들의 별장지대로 변해버렸다. 별장 주인들은 대부분 1년에 한두번 찾아올 뿐 이곳에 살지 않는다.

그뿐 아니다. 주인이 계속 바뀐다. 김권익씨는 "속았다"고 했다. "살지도 않을 심산이었으면서 부동산 투기로 집을 사들여 마을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마을은 죽어버렸다"고 했다.

 

김씨는 5살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테우를 타고 나가 자릿돔을 떴다. 잡은 자릿돔은 인근 중산간 마을인 납읍에서 보리로 바꿔왔다. 멸치떼가 들면 동네사람들이 모두 나와 함께 '멜을 후리고' 마을 공동창고에 멸치젓을 담갔다가 외지에 팔았다.

두어가족이 수영을 즐길만한 백사장에서는 지금까지 한번도 물놀이 사고가 난 적이 없다. 이 마을을 지나던 어느 제주목사가 잠시 쉬다가 파도가 없고 물이 맑은 바다를 보고 '한담'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전해진다.
 
김씨가 기억하는 그의 아버지 김용택씨는 힘이 장사였다. 말 앞다리를 어깨에 메고 수레에 실은 적도 있고, 바닷가에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혼자서 담을 쌓기도 했다.

한번은 동네 청년들이 바닷가에 있는 등돌을 옮기는 힘겨루기를 했다. 아무도 무릎 위 넘어까지 들어올리지 못하는 돌을 김용택씨가 한팔로 겨드랑이에 끼고 뭍으로 올라왔다는 것이다. 그 돌이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다.

 

집을 팔고 고향을 떠나 인근 애월리 등으로 옮겨간 마을 사람들은 20여년 세월이 지나도록 고향을 잊을 수 없었다. 이들이 돈을 모아 바닷가에 망향비를 세웠다.

"눈 감으면 이제도 파도소리 물새소리 들리는 내 고향 한담동.
꿈엔들 잊을 소냐. 어린 시절 태우배 타고 물내리면 짓동 모래밭에서 조개 잡는데
하늣여코지 저 멀리서 해녀 숨비소리 숨가쁘네.
하루종일 용드랑물에서 멱감던 추억들이여......."
 
'짓동 모래밭'은 두어가족이 물놀이 하기에 적당한 크기로, 물이 얕아 지금까지 한번도 물놀이 사고가 나지 않았다는 백사장이다. '하늣여'는 소라 미역 등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고 해서 '많다'는 뜻의 '한'자가 붙은 '물 속 바위군락'(여)의 이름이다.

한담 바닷가 바위들은 모양이 '만물상'을 닮아 바위마다 이름이 붙어있다. 맑은 바닷물과 아름다운 바위로 장식된 해안길이 한담의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너무 아름다워서 잃어버린 한담마을. 사람들은 떠나고 마을은 쥐죽은 듯 고요하지만 한담리의 올레길을 찾는 이들은 한담 바닷가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는다. 
 
금능석물원
 
한담을 뒤로 하고 인근 제주시 한림읍 금능리의 '금능석물원'을 찾았다. 작가의 해설없이는 작품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 명장 장공익 선생에게 직접 설명을 부탁해둔 터였다.

장 선생은 올해 81살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돌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나타난 그이는 돌가루를 뒤집어쓴 모습에 소매와 바짓단을 작은 키에 맞춰 잘라낸 허름한 작업복  차림이었다.

 

 

1년 만에 찾은 그곳에는 장 선생이 당시 작업중이던 '감 따는 아이들'이 완성돼 석물원 한복판에 서 있었다. 남녀 아이들이 감나무에 매달려 있고 나무 아래에서는 노인이 올려다 보는 작품이다. 장 선생의 설명은 이렇다.

젊은 여인을 둘째부인으로 얻은 노인은 나이가 들어 자식을 생산할 수 없었다. 자극이 필요했던 노인은 동네아이들에게 감을 따도록 나무에 오르게 한 뒤 여자아이의 치마 밑을 한참이나 쳐다봤다는 것이다. 즉각 효과를 보았고 막내를 얻게 됐다는 얘기다.

 

벨기에에 '오줌 누는 아이상'이 있다면 제주에는 '똥 누는 여인상'이 있다. 장 선생은 "점잖은 이들이야 이런 작품을 만들 리 없지만 과거 제주도에서는 매일 아침 집집마다 연출되던 실제 모습이어서 과감하게 새겼다"고 했다.

돛통시에서 달려드는 돼지의 주둥이가 몸에 닿지 않도록 요령껏 피해야 하는 제주의 화장실 문화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1년 전 땅 바닥에 전시됐던 '성희롱하는 해녀들'은 주변에 분수조각을 설치하고 담을 둘러 물이 고이도록 해 테우가 물에 뜬 모양으로 잘 꾸며 놓았다. 이 작품은 테우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로 나간 해녀들이 물질을 하다 잠시 쉬는 사이 유일한 남자인 사공을 성희롱하는 모습이다.

한 해녀는 아랫도리를 벗어 사공의 얼굴을 덮고, 뒤에서는 사공의 바지를 벗기고 있고, 다른 해녀는 사타구니를 쥐고 있는 형상이다. 이 일은 관련자 모두가 비밀로 간직한다는 것이다.

 

서민들의 생활상이나 실제로 있었던 사건 외에 제주의 전설이나 설화도 장 선생의 손에서 다시 태어난다. 그이는 설문대할망이 5백장군을 낳고 기르려면 열번 해산을 했을 것이고 한번에 50명씩 낳았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또 갓 태어난 쉰명의 아들들에게 젖을 먹이려면 유방은 세개에, 젖꼭지는 5개씩 달렸을 것이라고 했다.

 

장 선생은 제주시 회천동 화천사에 모아놓은 '석상 5기'에 대해 명쾌하게 해석한다. 제주목사 이형상이 절 5백 당 5백을 없앴을 때 민간에서는 새롭게 신상을 제작해 숲이나 인적이 드문 곳에 숨겨두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제주의 민속과 설화를 조각작품으로 표현하는 작업의 하나로 그이는 이들 신상과 같은 분위기의 석상 2기를 소품으로 복제해놓았다. 

 

그이의 작품세계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4.3의 비극을 기억하고, 억울한 죽음을 위무하는 한편, 통일을 염원하는 역사의식으로 발전한다.

장 선생은 석물원에 4.3 당시 불태워져 사라진 고향마을 '한산이왓'의 초가 15채를 재현해놓았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사람들의 얼굴이 조각된 방사탑을 세웠다. 4.3 때 외가가 있는 한림으로 갔다가 돌아왔을 때 친구와 친척들은 모두 죽어 아무도 다시 만날 수 없었다고 했다.

분단조국의 미래세대가 통일을 이루기를 염원하는 '한반도상'에는 동자들이 모여들어 힘을 모으고 있다. 한반도 남녘 제주섬에는 남과 북 어린이들의 통일노력을 격려하는 여자어린이가 한 팔을 치켜든 모습을 세워놓았다.

 

우리의 가슴 한켠을 아리게 한 '너무 아름다워서 잃어버린 마을'에 대한 조금 전의 기억은 장 선생의 놀라운 상상력과 그이가 간직한 새로운 희망으로 인해 한층 밝아져 있었다.

우리는 설명을 마치고 작업장으로 바삐 걸음을 옮기는 장 선생의 건강을 기원하면서 버스에 올랐다.

 

<프로필>
제주포럼C 공동대표
전 한겨레신문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