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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어지러운 민심 수습하라고 경을 보내니”
“제주도의 어지러운 민심 수습하라고 경을 보내니”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1.07.12 12:0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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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역사 30選] ③ 제주목사 이규원...도민 애정으로 임기 연장

  화북비석거리에 이규원 제주목사를 기리는 청덕비(가운데)가 있다.

조선중기 안용복이 있다면 후기엔 이규원(1833~1901)을 주목해야 한다. 안용복은 민간인 신분으로 울릉도를 사수했고, 이규원은 정부의 명을 받아 울릉도 개척에 나선 인물이다.

이규원이 활동하던 시절, 조선은 각종 외압에 시달리고 있을 때다. 고종은 그에게 ‘울릉도검찰사’라는 특별한 임무를 부여한다. 그런 직을 수행한 이는 조선시대 이규원이 유일했다. 조선조정은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울릉도 주민들의 피해가 크자 그들을 모두 본토로 강제 이주시킨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일본인들이 울릉도에서 잦은 불법 점거를 일삼자 고종은 울릉도 문제를 해결할 인물로 이규원을 지목했다.

울릉도 문제를 해결한 이규원은 다시 고종의 부름을 받는다. 고종의 명으로 그가 발길을 디딘 곳은 제주도였다. 그가 맡은 일은 제주목사이면서 찰리사를 겸하도록 했다. 군사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찰리사가 필요한 이유는 당시 제주도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들여다보면 당시 상황을 읽게 된다.

“제주는 멀리 바다 밖에 있어서 주민들이 가난해 어렵게 사는데 여러 폐단이 점점 늘어나 안도할 수 없습니다. 이런 때 이규원을 임명한 건 만리 밖의 사정을 섬돌 앞의 일같이 통찰하는 성상의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고을은 현재 바로잡을 일이 많으니 찰리사 겸 제주목사로 보내는 게 어떻습니까”<고종실록 28권, 고종 28년(1891년) 8월 4일>

이규원의 신임은 두터웠다. 고종은 제주로 떠나기전 하직인사를 하러 온 이규원에게 “멀리 떨어져 있는 섬에 임금의 교화가 미치지 못한다. 명성과 업적이 있는 사람을 골라서 임명한 다음에라야 백성을 안정시키고 무마하는 방책을 찾을 수 있기에 경을 임명했다”고 밝히고 있다.

국립제주박물관이 이규원을 ‘제주역사 30선’으로 선정한 이유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인데다, 그와 관련된 자료를 많이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규원 관련 자료는 증손녀인 이혜은씨(동국대 교수)가 기증했다. 2002년 247점, 2003년 104점 등 모두 351점을 국립제주박물관에 내놓았다.

   이규원을 제주목사로 임명한 교지
  제주도내 휘하 군대를 지휘할 때 사용한 사명기(司命旗).

   이규원의 호패
관련 유물 가운데는 제주와 목사 이규원과의 관계를 읽을 수 있는 교지와 사명기(司命旗)는 물론 이규원 가계의 유물도 포함돼 있다. 특히 독도과 울릉도 지킴이로서의 역할을 했음을 읽을 수 있는 「울릉도검찰일기」도 있다.

이규원은 무과에 급제한 무신이지만 문무를 모두 겸비했다. 학문에도 뛰어났음은 물론, 백성을 잘 다스린 인물로 평가를 받고 있다.

1891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그는 제주사람들의 어려운 사정을 중앙에 호소하기도 했다. 당시 쌀이 나지 않는 추자도 주민들은 고기잡이를 통해 마련한 돈을 쌀 대신 내오곤 했다. 그런데 쌀로 세금을 내야한다는 사실에 이규원은 문제를 제기했다.

“논이 없는 고장에서 쌀을 바치자니 실로 마련하기 어렵습니다. (추자도) 백성들이 쌀을 바친 적이 없는데, 갑자기 쌀을 바치도록 독촉하는 것은 조정에서 섬의 백성을 돌보는 뜻에 어긋납니다.”<고종실록 30권, 고종 30년(1893년) 10월 28일>

옛 기록을 보면 제주사람들이 기근에 시달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규원이 제주 목사로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1893년 제주도에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부족했다. 이규원은 부족한 식량 문제 해결을 위해 다른 지역의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 섬은 바다 멀리 있으며 척박한 땅이므로 설사 풍년이 들더라도 오히려 식량이 모자라서 걱정하는데 근년에는 농사가 잘 되지 않아 백성들이 위태로우니 이런 사람들에 대한 구제를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고종실록 31권, 고종 31년(1894년) 1월 27일>

그의 요청으로 호남 지역에서 곡식 1000석이 긴급 투입된다.

조선시대 제주목사를 역임한 이는 모두 286명이다. 평균 재임기간은 1년 10개월 정도이다. 조선시대 수령의 임기가 30개월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대부분은 기간을 채우지 못한 셈이다. 하지만 이규원은 자신의 임기를 다 채우고도 1년 3개월을 더하게 된다. 이유는 제주도민들의 그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제주목사 이규원이 이제 임기가 다 되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그런데 명성과 업적이 크게 드러나 백성들이 그가 떠나갈 것을 애석해 할 뿐아니라 지금 진휼하는 정사가 급하니 이런 때 교체하는 것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고종실록 31권, 고종 31년(1894년) 2월 3일>

이규원이 떠난 뒤 도민들은 그를 기리는 청덕비(淸德碑)를 세웠다. 현재 화북비석거리에 다른 비석과 나란히 서 있다. 그 비엔 ‘삼읍안도(三邑安堵)’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그가 재임하면서 제주도민들을 편안하게 해줬다는 얘기다.

이규원은 이후 현재의 국방부장관에 해당하는 군무아문대신(軍務衙門大臣)을 지낸다. 일본이 독도문제를 늘어지고 있는 이 때, 울릉도와 독도문제를 해결한 인물이 제주도의 목사로 왔다는 점에서 그에 대한 재조명이 더욱 필요해 보인다.

  이규원이 쓴 '울릉도검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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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fjfj 2011-07-18 17: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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