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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리 앞바다에 수장된 탐라 유력세력은 누구일까”
“신창리 앞바다에 수장된 탐라 유력세력은 누구일까”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2.02.12 12: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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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역사 30選] <10> 신창리 해저에서 나온 유물…금팔찌와 금제뒤꽂이 등 나와

보물선. 말만 들어도 설레는 단어다. 넓은 바다에서 보물선을 찾기란 모래알을 골라내는 작업이나 마찬가지다. 그만큼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아무리 역사적 실체가 확실한 사실이어도 바닷속에 있는 보물선은 쉽게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최첨단 장비와 기술을 무색하게 만드는 게 바로 보물선이다.

역사적으로 기록된 사건 가운데 1905년 발생한 러일전쟁이 있다. 당시 러시아는 38척의 발틱함대를 이끌고 러일전쟁에 임했다. 이들 배 가운데 군자금으로 사용할 금괴와 골동품을 가득 실은 니히모프함도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발틱함대는 대한해협 인근에서 일본 해군의 집중 포격을 받고 위기에 처한다. 발틱함대는 니히모프함의 금괴를 돈스코이함으로 옮겨 싣고 도주를 하다가 울릉도 저동 앞바다에서 침몰한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역사적 실체가 분명한 보물선 돈스코이함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러다 1999년 동아건설이 돈스코이함으로 추정되는 선체를 찾는다. 그러나 비용문제로 보물선 찾기는 추진되지 못하고 동아건설은 부도 처리되는 운명을 겪는다.

바다는 항해의 역사만큼이나 수많은 보물을 간직하고 있다. 세상에 드러내는 건 극히 일부분이다. 돈스코이함은 역사적 실체에도 불구, 금괴는 여전히 바다에 매장돼 있다.

어찌보면 보물선은 우연한 기회에 모습을 드러낸다. 지난 1976년 한 어부가 신안군 앞바다에서 그물을 건져올렸다. 그런데 그물에 걸려온 건 작은 항아리였고, 보통 항아리가 아닌 중국의 절강성 룽취안(龍泉) 가마터에서 만들어진 청자였다.

보물선이 떨군 유물은 신안군에서만 발견된 건 아니다. 제주에도 해저 유물이 발견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제주시 한경면 신창리 해저에서 나온 유물이 그것들이다. 신창리 해저 유물로는 금팔찌, 금제뒤꽂이, 청자대접 조각 등이 있다. 신안 해저 유물이 어부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면, 신창 해저 유물은 해녀들의 물질에 의해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신창리 해저에서 발견된 금제뒤꽂이
신창리 해저에서 발견된 금팔찌
신창 해저 유물은 중세시대의 동아시아 교류를 알려주는 자료의 하나다. 전남의 신안·완도 해저 유적 탐사에 이어, 제주에서도 해저 유적탐사가 이뤄진다. 지난 1997년 제주대박물관이 제주도에서는 처음으로 수중 고고학 탐사를 벌인다. 이 곳에서 발견된 대접 안쪽바닥엔 하빈유범(河濱遺范)’금옥만당(金玉滿堂)’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하빈유범금옥만당은 중국 남송대(1129~1279) 룽취안 가마에서 생산된 자기를 구별하는 일종의 사인이다. 이들 명문이 담긴 그릇은 일본 규슈의 다이자후(太宰府) 유적에서 출토되기도 했다.

중국 룽취안 가마는 1600년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절정을 누린 때는 남송과 원나라 시절이다. 그렇다면 신안 해저 유물에서도 발견된 룽취안 청자와 제주에서 발견된 룽취안 청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한경면 신창에서 나온 청자는 하빈유범금옥만당이라는 명문이 남송대임을 말해 주고 있고, 전남 신안 유물은 1323년 원나라 당시 중국 닝포항을 출발해 일본으로 가던 중국의 무역선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하빈유범'이 새겨진 청자 조각.
이런 결과대로라면 제주도 신창에서 나온 유물의 역사가 더 오래됐음을 알게 된다. 특히 남송대는 고려의 대외무역이 매우 활발한 때였다. 고려는 남송은 물론 거란·일본 등과도 활발한 교역을 이어갔다.

남송대 탐라는 독자적인 위치에서 점차 고려의 통제력을 받는 시점으로 이동되는 때다. 무역국가였던 고려는 탐라를 매우 필요로 했다. 송나라와 일본을 잇는 중간 지점에 위치한 탐라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곳이었기 때문이다. 남송대 들면서 탐라는 고려 군현제에 편입되고, 중앙정부의 지방관이 파견되면서 중앙과 탐라민들간의 잦은 알력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탐라가 남송과 고려, 고려와 일본을 잇는 중간 기착지로서 매우 중요하기는 했으나 신창리 해저 유물로는 뭔가 부족한 게 많다. 신창 해저 유물은 얼마 깊지 않은 곳에서 발견됐고, 유물의 수량은 물론이고 온전한 물건이 없다는 점도 의문이다. 신창 해저 유물은 수중 조사에서 50여점만이 나왔다. 28000여점이 발견된 신안 유물이나, 3만여점이 나온 완도 해저 유물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발견 유물의 양으로 따진다면 신창 해저 유물을 실은 배는 무역선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1997년 수중 탐사 결과 유물 발견 지점의 바깥 공해상에서는 유물들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게다가 신창 해저 유물을 남긴 배는 왜 하필이면 암초가 많은 곳을 택해서 운행을 했을까. 무역선이 아니라면 누구일까. 금팔찌와 금제뒤꽂이는 아무나 사용하는 물건이 아니다. 귀족세력이 탄 배가 신창리 앞바다를 지나갔을 수 있다. 그렇다면 탐라의 유력세력이 중국 등지로 이동을 하다가 변을 당한 것은 아닐까.

<김형훈 기자 / 저작권자 미디어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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