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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적(敵)인 발해 유물이 탐라에 있는 이유는 뭘까
신라의 적(敵)인 발해 유물이 탐라에 있는 이유는 뭘까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2.04.22 09:39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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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역사 30選] <12> 용담동 제사유적에서 발굴된 금동허리띠 꾸미개

제주시 용담동 제사유적에서 발굴된 금동허리띠꾸미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유물이다.
1992년 제주시 용담동 유적(제사유적) 발굴 현장에서 아주 특이한 유물이 발견된다. 3.4, 길이 2.8의 꽃문양(흔히 인동무늬라고 부름)이 새겨진 금동허리띠꾸미개다. 당시 현장을 발굴했던 한 학자는 유적 틈새에서 뭔가 나왔는데 현대 물건으로 알고 버리려했다고 했을 정도로, 용담동 제사유적의 금동허리띠꾸미개는 고고(考古) 발굴에서 흔히 보이는 유물이 아니었다.

발굴 순간 버림받을 운명에 처하는 위기를 맞았던 금동허리띠꾸미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용담동 제사유적에서 나온 금동허리띠꾸미개와 닮은 유물은 지금까지 한반도 어디에서도 발견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의문만 쌓여갔다. 흔히 말하는 역사의 미스터리.

제주에서 금동허리띠꾸미개가 나온 지 10년만에 비슷한 유물이 발굴된다. 한반도가 아닌 섬나라 일본에서다. 2001년 일본 가나자와시 우네다히가시(畝田東)나베타 유적에서 용담동 유적에서 나온 금동허리띠꾸미개를 닮은 유적이 나온다. 나베타 유적에서 나온 금동허리띠꾸미개는 용담동 유적의 것에 비해 크기(1.9×1.8)가 작다는 점만 다를 뿐 모양새나 기법이 매우 비슷하다.

일본에서의 유적발굴은 10년간 잠자고 있던 역사의 실체에 대한 한가닥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데 커다란 의미가 있다. 2001년 당시 요미우리신문(523일자 보도)발해로부터?’라는 제목을 통해 이 금동제 허리띠꾸미개를 보도하고 있다. 이 신문은 중국 동북부의 발해로부터 반입된 가능성이 높고, 발해와의 교류를 증명하는 국내 첫 사례다고 쓰고 있다.

일본의 우네다히가시(畝田東)의 ‘나베타 유적’에서 나온 금동허리띠꾸미개. 꽃문양이나 모양새가 용담동의 것과 흡사하다.
그렇다면 탐라국이 발해와 직접 교역을 했다는 말인가. 그럴 가능성은 있을까? 용담동 제사유적과 당시 국제상황을 살펴보자.

용담동 제사유적은 8~9세기 때 유적이다. 여기서 발굴된 도기와 청동제 숟가락 등이 8~9세기 통일신라 유적에서 나오고 있다는 점은 용담동 제사유적의 편년을 8~9세기라고 보는 이유다. 특히 용담동 제사유적에서는 고급 그릇인 도기만 버렸다는 점에서 뭔가 특별한 의식을 치른 것으로 보인다. 용담동 제사유적과 비슷한 시기에 전남 완도의 청해진 유적, 울릉도 현포리 유적 등이 있다. 이들 유적의 공통점은 해상활동의 안전을 기원하는 제사장소의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왜 고급 그릇을 마구 버렸는가에 대한 의문도 의문이지만 과연 당시 탐라국이 일본이나 여타 나라와 교역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된다. 독자적인 세력을 갖추고 있던 탐라국은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위세에 눌리게 된다. 가뜩이나 발해가 건국을 하면서 신라는 중앙집권적 체제를 강화하고, 발해와는 대립각을 세운다. 아울러 일본과 직접 교역을 하던 탐라국은 8세기 이후 일본과의 공식 국교는 단절된다.

신라와 앙숙관계에 놓였던 발해의 주요 교역 대상국은 당나라와 일본이었다. 발해는 이 두나라와의 교역을 위해 모두 5개의 교통로를 두고 있었다. 이 가운데 해상을 통한 일본과의 루트가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 발해는 일본을 거쳐 당나라와의 교역을 이어갔다. 이 중간에 지금의 제주도인 탐라국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통일신라의 세력이 강하던 8세기는 탐라와 일본과의 직접적인 교역은 힘들었겠지만 통일신라 말기에 접어들면 지방호족세력이 득세를 한 것과 맞물려 탐라-일본의 교역의 쉽게 이뤄졌다고 추측이 가능하다. 용담동 유적의 금동허리띠꾸미개는 바로 이 시점에 제주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커진다.

허리띠꾸미개는 삼국시대엔 매우 화려하다가 점차 퇴색된다. 특히 당나라의 허리띠꾸미개는 구슬로 표면을 화려하게 꾸미기는 하지만 꽃문양을 한 예는 없다. 꽃문양을 한 허리띠꾸미개는 당나라 북쪽지방에서 확인이 되며, 거란(이후 요나라)에서 많이 쓰였다. 발해도 당나라의 복식제도를 도입해 무늬 없는 허리띠꾸미개를 써왔으나 꽃문양을 한 유물이 간혹 발굴되기도 한다.

여기에서 일본 우네다(畝田) 지역의 나베타 유적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나베타 유적은 대규모 건물터가 발견된데다, ‘()’이라고 쓰인 그릇이 발견됐다. ‘()’은 외국에서 온 이들에게 쓴 용어로, 이 건물터는 발해 사절과 연관이 있다고 일본 학계는 설명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에서 발견된 금동허리띠꾸미개 역시 발해의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용담동 유적에서 나온 유물이 발해의 것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일본인 학자인 고지마 요시타카씨(가나자와대 교수)는 자신의 논문을 통해 나베타 유적에서 나온 허리띠꾸미개는 당나라 양식의 형상에 거란양식의 꽃문양이 새겨졌다. 두 개의 문화가 융합해 만들어졌다면서 발해인과 거란인의 접촉이 빈번해지면서 발해인이 독자적으로 신분표시 장치로 꽃문양을 새긴 허리띠꾸미개를 제작한 것 같다고 말한다.

꽃문양허리띠꾸미개가 발굴된 지역. 거란(요나라)과 발해 지역을 중심으로 발굴되며, 그 외의 지역에서는 제주도 용담동 유적과 일본의 우네다히가시에서만 발굴됐다.
고지마 교수의 논문을 참고로 한다면 용담동 유적에서 나온 허리띠꾸미개는 발해에서 제작됐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럼 어째서 금동허리띠꾸미개가 제주도에서 발견됐을까. 용담동 유적이 8세기가 아닌 9세기 때 유적이라고 한다면 설명이 가능해진다. 앞서 설명했듯이 8세기는 탐라가 통일신라의 위세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할 때였다. 하지만 9세기는 지방호족들이 득세한데다, 해상엔 장보고를 중심으로 활발한 무역이 진행되고 있었기에 발해인들이 얼마든지 제주도를 기항지로 택했을 수 있다. 그러면서 발해인이 탐라를 오고간 교역의 증거로 금동허리띠꾸미개를 제주에 남겨놓고 갔을 수 있다.

이는 용담동 제사유적이 갖는 의미를 되짚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용담동 제사유적은 탐라국이 활발한 해상활동을 했다는 하나의 증거이다. 용담동 제사유적에서 나오는 유물은 당시로는 고급 수입제품이 많았기에, 탐라국 차원에서 용담동 일대에서 제사를 지냈음은 물론이다. 용담동 제사유적은 탐라국이 신라의 울타리를 벗어나 예전처럼 해상왕국으로서 서서히 기지개를 펴던 상황을 일깨운다. 여기서 나온 금동허리띠꾸미개는 바로 그러한 증표이기도 하다. 아울러 금동허리띠꾸미개를 통해 신라와는 숙명적 라이벌인 발해와 소통을 하려 한 탐라인들의 의지도 읽힌다.

<김형훈 기자 / 저작권자 미디어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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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훈 2012-04-25 13:54:49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앞으로 글을 쓸 때 참고해야 할 게 많을 것 같습니다. 연락처를 제 개인메일(coffa@naver.com)로 남겨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바랍니다.

탐라 2012-04-25 13:03:28
한국에서도 금동제 과대가 다수 출토된다. 특히 당식과대는 백제 보다 오히려 신라지역에서 출토량이 많다. 신라 출토 방형과판의 일반화된 규격(세로 2.7∼2.9㎝, 가로 3.0∼3.2㎝)과 교구의 형태가 용담동 출토품과 비슷하다. 특히 7세기 후반 이후 과판의 수공 제작과 착장방식은 물론 정형화, 규격화된 과대가 생산, 유통된다. 생산공급의 중심지는 역시 경주지역으로 학계에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신라가 당나라의 의복제를 도입했다(진덕왕 3년, 649)는 문헌기록 역시 참고가 된다. 따라서 용담동에서 출토된 당식과대는 통일신라토기와 동반 출토되며 발해 혹은 일본토기가 확인되지 않는 점을 보면 신라의 중심지인 경주지역에서 유입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발해 혹은 중국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신라의 규격화된 과대와 유사한 점을 보면 직접적으로 논의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하다.
한편 제주지역에서 출토되는 토기를 보면 백제토기의 출토량이 매우 적고 통일신라기에 접어들면서 다량의 토기가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통일기에 오히려 탐라가 신라와 활발한 상호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말해주는 증거에 해당한다. 특히 발해 혹은 일본과 많은 교역이 있었다면 당연히 양 지역의 토기가 출토되어야 하지만 아직까지 제주에서 확인된 예가 없다. 오히려 대부분의 토기가 통일신라토기이며 중국자기가 소량 확인되는 점은 당-신라-탐라의 교역루트를 시사한다.
단순히 문양의 유사성과 단 1점의 유물을 통해 상호 교류를 확대해석하는 것은 위험하다. 발해 혹은 일본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논의하려면 적어도 세트화된 의기성 유물 혹은 다량의 토기가 유입되어야 가능하다. 또한 용담동유적이 타지역에서 확인된 해상교류상의 중요한 제사유적이라면 더욱더 교역 대상국의 토기가 다량 출토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