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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시대에 제주에도 대규모 탐라정치체가 존재했다”
“삼한시대에 제주에도 대규모 탐라정치체가 존재했다”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3.03.0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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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주씨 논문서 ‘용담동 철기부장묘’ 시기 3세기로 첫 제시

용담동 철기부장묘.
우리나라 철기시대를 대표하는 곳은 진한과 변한 지역이다. 이 지역에서 만들어진 철기류는 일본까지 수출될 정도였다. 그렇다면 삼한시대 때 제주사회도 진·변한 지역에서 만들어진 철기를 사용했을까, 아니면 직접 제작을 한 것일까.

지난 1984년 제주시 용담동에서 발굴된 철기부장묘는 제주 철기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나온 철기에 대해 지금까지는 기원전의 것이었다’, ‘2~3세기로 보인다는 가정만 있어왔다. 구체적인 시기를 일러주지 못해왔다.

최근 이런 한계를 깨뜨린 논문이 나와 관심을 끈다. 김경주 제주문화유산연구원 연구실장이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40주년 기념논총에서 용담동 철기부장묘와 그 피장자의 성격이라는 논문을 통해 용담동 철기부장묘의 주인은 3세기 전반에서 중반이라는 답을 내놓았다.

특히 이 논문은 영남지역과의 교차 검토를 거쳐 용담동 철기부장묘 주인공의 지위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철기문화가 본격 도입된 건 기원전 2세기를 전후로 한 시기이다. 한국식동검과 동거를 한 시기였다. 초기 철검은 몸체가 짧은 형태였다. 한국식동검의 모양을 띠고 있다고 보면 된다. 철검이 쓰임새와 상징성에서 동검과 차별화를 시도하는 건 장검의 등장부터이다. 용담동 철기부장묘에서 나온 대표적인 철기가 바로 철제장검이다. 철제장검이 본격적으로 보급된 건 기원전 1세기 이후로 보고 있다. 중국 전한시대 말에서 후한시대 초기 때부터 보급되며, 우리나라엔 2세기 이후에야 무덤에 함께 묻히고 있다.

<철제장검 및 주조철부 분포도>
우리나라에서 철제장검이 함께 묻힌 묘는 25곳이며, 대부분은 영남지역에 분포돼 있다. 영남지역이 많은 이유는 철기를 만들었던 지역이라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철제장검도 3세기 중반 이후엔 영남지역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환두대도’(손잡이 끝부분에 둥근 고리가 있는 칼)의 등장과 맞물린다.

그런데 왜 장검이 등장했을까. 그건 제철기술의 발달에서 찾아야 한다. 아울러 잦은 전쟁과도 무관하지 않다. 칼의 대형화는 전쟁에서 상대에게 커다란 피해를 안기고, 공격범위도 확대된다는 측면이 있다.

장검은 또 권력의 상징이기도 했다. 용담동 철기부장묘에서 나온 장검의 몸체는 60를 넘으며 손잡이를 포함한 전체 길이는 85나 된다. 특히 궐수문(고사리문양)은 눈여겨봐야 한다. 용담동 철기부장묘에서 나온 철제장검의 특징은 궐수문(고사리문양)이 확인되고 있다는 점이다. 궐수문은 제사장 혹은 권력의 가장 정점에 있는 이들처럼 특수 신분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알려져 있다. 궐수문철기는 3세기 중반까지 최상급묘에서 한정적으로 출토되고 있으며, 각 지역 엘리트의 전유물이었다.

용담동에서 철기부장묘에서 나온 철제장검.
손잡이에 궐수문이 장식된 철제장검. 궐수문은 특수한 지위에서만 보유했다. 사진은 김해 양동리 313호 고분의 것이다.
사진은 환두대도. 철제장검은 환두대도의 등장 이후 소멸된다.
용담동 철기부장묘에서 나온 철제장검은 제주에서 만들었을까, 수입을 한 것일까. 일반적으로 철기제작 기술은 제철기술자의 이주 없이 단순한 기술적 정보를 통해서는 제작하는 게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때문에 용담동 철제장검은 수입을 해왔다고 봐야 한다. 더욱이 장검은 기술력이 동반되지 않고서는 만들 수 없는 것이기에 진·변한지역의 생산품이라고 볼 수 있다.

궐수문철기가 3세기 중반까지 나온다는 점에서, 철제장검도 이 시기를 끝으로 영남지역에서 볼 수 없기에 수입된 용담동 철기부장묘의 철제장검 역시 3세기 중반을 넘어갈 수 없다.

이같은 철제장검은 아무나 보유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보급률도 매우 낮았고, 영남지방에서도 극히 일부에서만 부장품으로 확인된다. 그렇다면 철제장검이 부장된 묘의 주인공은 최고의 계층일 수밖에 없다. 용담동 철기부장묘의 주인공 역시 상당한 지위에 있음을 읽게 된다.

김경주씨는 용담동 철기부장묘를 3세기로 제시한 건 이 논문이 처음이다장검은 영남지방의 경우 상위계층의 묘에 부장되는 중요한 철제품이다. 철제 무기류를 함께 묻었다는 것은 용담동 철기부장묘 피장자의 권위를 상징하고 동시에 지배계층으로서의 위상을 확립하는 결과물이다고 설명했다.

더욱이 이 시기는 나라[]’ 성립 이전의 정치체를 이룰 때다. 용담동 철기부장묘 주위에는 대규모 취락이 존재하고 있었다. 용담동 일대에 위치한 대규모 취락은 한반도와의 교류를 통해 선진문물을 받아들였고, 탐라의 중심취락으로 성장해갔다.

김경주씨는 계획된 취락이 조성됐다는 점은 일정한 수준의 상위계층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대외적으로 철 등을 매개로 진·변한 및 마한세력과 교류했던 읍락수준의 취락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논문에서 보듯 철제장검은 고대 탐라에 존재했던 지배세력의 성격을 규정짓는 하나의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다. 영남지역에서도 일부에서만 나오는 철제장검의 주인공이 용담동 철기부장묘의 피장자라는 점은 제주에서 최상의 지배계층이 제주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이는 곳 현재 탐라라고 불리는 정치체나 그 전 단계의 정치체제가 제주에도 갖춰져 있다는 방증이다.

<김형훈 기자 / 저작권자 미디어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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