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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돌칼의 주인은 청동기 시대 육지부와 교류하던 실력자였다
간돌칼의 주인은 청동기 시대 육지부와 교류하던 실력자였다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3.04.27 10: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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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역사 30選] <19> 삼양동 유적 간돌칼(마제석검)

철학의 한 갈래인 도교는 죽음과 관련, 삼시충 신앙을 내세운다. 사람의 몸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삼시충이 있으며, 경신일(庚申日)이 되면 삼시충이 하늘로 올라가 사람이 저지른 죄악을 일러바친다고 한다. 그래서 경신일엔 밤을 새워 삼시충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경신일에 밤을 새는 풍습은 조선조 영정조 때까지 지속됐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경신일과 관련된 기록이 나온다. 연산군이 경신일에 유희삼아 내기를 하자고 제안을 했더니 대사헌 이집 등이 만류했다(연산군일기 31123)는 기록이 있다. 이집은 경신일은 민간에서 하는 것이라며 하지 말 것을 요구했으나 연산군은 강행했다고 실록은 쓰고 있다.

대체 죽음은 무엇일까. 조선조까지도 궁중내에서 경신일 관련 기록이 나온다는 점은 유교가 대세인 시대에도, 죽음과 관련해서는 민간에서 이어져오는 신앙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삼양동 유적에서 나온 간돌칼(마제석검). 가장 왼쪽 간돌칼이 무덤에서 나온 것으로 손잡이가 없는 유경식이다. 나머지 간돌칼 3개는 손잡이를 갖춘 유병식이다.
갑작스레 죽음을 꺼낸 건 죽음의 신앙은 오랜 유산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기원전 시대인 청동기시대는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더 소중했음은 물론이다. 청동기시대는 죽음은 일상이었고, 죽음을 치르는 의식은 매우 중요했다. 여기엔 빠질 수 없는 게 있다. 바로 껴묻거리, 즉 부장품이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간돌칼(마제석검)도 죽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간돌칼은 우리나라와 이웃한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보기 드물며, 한반도를 중심으로 분포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돌을 갈아서 만들어야 하기에 제작이 쉽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무덤의 부장용이나, 몸에 지니고 다니는 과시용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학자들은 설명한다. 그렇다면 간돌칼은 일종의 신분상징용으로 봐도 되겠다.

제주에서는 삼양동 유적과 서귀포시 대포동 유적에서 간돌칼이 발견됐다. 육지부에서는 고인돌 등 무덤에서 간돌칼이 많이 출토되지만 제주에서는 단 한 점만 무덤에서 나왔다. 삼양동 유적의 토광묘(움무덤)에서 나온 간돌칼이 무덤 출토로는 유일하다.

우리나라 고고 연구가 그렇듯, 간돌칼의 경우도 일본인 학자들이 본격 연구를 진행했다. 조선총독부 마지막 박물관장을 지낸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씨가 일본인 학자들의 연구를 종합해서 조선 마제석검의 연구라는 책을 펴냈다. 아리미쓰씨는 이 책에서 형태 분류는 물론, 간돌칼이 동검(銅劍)의 모양을 따와서 제작됐다고 제시하고 있다.

이후 학자들은 간돌칼의 형태를 매우 세분해서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간돌칼의 형태를 세세하게 구분할 필요는 없겠다. 간돌칼의 이해를 돕기 위해 손잡이의 유무로 판별하는 게 가장 쉬울 듯하다. 간돌칼은 유병식(有柄式)’유경식(有莖式)’으로 나뉜다. 유병식은 손잡이를 둔 경우를 말한다. 유경식은 손잡이 없이 다른 재료와의 결합 부분, 즉 슴베가 있는 걸 말한다.

육지부에서 발굴된 유병식 간돌칼. 유경식에 비해 복잡하게 모양을 낸다.
삼양동 유적 움무덤에서 나온 간돌칼에 나무 손잡이를 만들어 끼워본 모양.
손잡이의 유무는 간돌칼의 시대를 구분짓는데 매우 중요하다. 손잡이를 가진 간돌칼의 시대가 앞서며, 슴베만 있는 간돌칼은 청동시기대 후기에 주로 쓰인다. 손잡이의 유무는 칼의 모양을 좌지우지한다. 손잡이를 지닌 간돌칼은 슴베만 갖춘 칼에 비해 상대적으로 칼의 위용이 넘친다. 손잡이가 있는 유병식은 돌을 아주 정성스레 갈아야 만들 수 있는 어려운 작업으로, 시간이 흐른 뒤에 등장하는 슴베를 갖춘 칼에 비해 멋이 넘친다. 그런데, 왜 앞선 시대의 간돌칼이 위용이 넘치고 멋이 있을까. 이는 청동기의 보급과 연관을 지을 수 있다. 청동기 후기에 오면서부터 차츰 청동기의 쓰임이 많아지게 되고, 간돌칼은 그만큼 그 위치가 축소됐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간돌칼에 많은 정성을 쏟는 일이 줄어들지 않았을까.

제주에서 발견된 간돌칼 가운데 완제품으로 나오는 건 단 2개로, 삼양동 유적과 서귀포시 대포동 유적 등 2곳에서 발굴됐다. 모두 청동기시대 후기 단계의 유경식 간돌칼이다. 나머지는 일부만 남겨진 간돌칼 몇 점 뿐이다. 제주에서의 간돌칼은 수량면에서 극히 드물게 발견되는 유물이다.

그렇다면 간돌칼은 왜 만들었을까. 아니, 만들었다는 말은 제주와는 거리가 멀다. 간돌칼의 재질은 제주에서 보기 드문 것으로, 육지부에서 제주로 수입을 해서 썼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서도 제주에서 청동의 쓰임은 드물다. 제주지역의 청동기시대엔 청동검이 발굴되지 않고, 초기 철기시대에 가서야 청동검이 나타난다. 이런 점을 본다면 제주에서의 간돌칼이 차지하는 의미도 달리 봐야 한다. 청동검을 쓴 이들이 세력자이듯 간돌칼을 지닌 이들은 탐라이전 제주지역 청동기시대의 실력자였음을 입증하는 사례가 아닐까.

삼양동 유적 움무덤의 간돌칼. 붉은 원내가 무덤 속 간돌칼이며, 붉은 네모는 간돌칼을 확대한 모습.
삼양동 움무덤의 주인은 부장품으로 간돌칼을 함께 가져갔다. 긴 세월이 흐르며 무덤 주인은 흙이 됐으나 간돌칼은 유물로 당시의 흔적을 말하고 있다. 삼양동 움무덤의 주인이 있던 시대는 마을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단계이다. 삼양동 움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제주에서 탐라라는 정치체제가 등장하기 이전에 마을을 지배했던 위치에 있던 이였음은 분명한 듯하다. 아울러 그는 육지부와의 활발한 교류를 이어가며, 독립적인 정치체제를 만들어가던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고 가정해본다. 비록 가정을 내세웠으나 억측만은 아니라고 본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김형훈 기자 / 저작권자 미디어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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