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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국에 앞서 강력한 정치세력을 지닌 이는 누구였을까”
“탐라국에 앞서 강력한 정치세력을 지닌 이는 누구였을까”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3.06.29 12: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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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역사 30選] <20> 구좌읍 종달리에서 발견된 한국식동검

한국식동검 칼 끝부분.

고고학에서 나누는 시대구분은 19세기 들어 정착된다. 최초의 시대구분법은 톰센에 의해 적용됐다. 톰센은 덴마크국립박물관의 초대 관장으로, 1836년에 만들어진 덴마크국립박물관 안내책자를 만들면서 무기와 도구를 만드는데 사용된 도구에 따라 돌의 시대, 청동의 시대, 철의 시대로 구분했다.

이런 3시대법은 고고학의 문화단계를 구분 짓는 결정적인 기준이 됐다. 이후 고고학자 러복이 석기시대를 뗀석기와 간석기의 사용에 따라 구석기와 신석기로 나누면서 4시대법이 갖춰진다.

3시대법이나 4시대법은 무기와 도구의 쓰임에 따라 시대를 나눴다. 그런 점에서 3시대법이나 4시대법은 고고학의 편년을 결정하는 체계적인 방법으로 유효했고, 지금도 그런 시대구분법을 따른다는 점에서 톰센이나 러복의 노력은 인정할 만하다.

하지만 한반도 상황과 이런 시대 구분은 제대로 들어맞지 않는다. 우리나라 청동기시대는 간석기가, 철기시대는 청동기가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의 청동기 시작은 청동기를 기준점으로 삼은 게 아니라 어떤 토기를 사용하고 있는지에 중점을 두고 있다. 신석기시대까지는 빗살무늬토기 문화였다고 보고 있으며, 이후 무늬없는토기의 등장을 본격적인 청동기시대로 구분한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청동기보다는 여전히 간석기의 쓰임이 월등하다. 우리나라 청동기시대는 청동기는 많이 보이지 않지만 간석기와 무늬없는토기의 등장, 고인돌과 같은 새로운 묘제의 채택을 이전 시대와 다른 시대로 가르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나라의 철기시대도 서양에서 말하는 3시대법이나 4시대법과는 맞지 않다. 서양과 달리 우리나라는 청동기시대를 구분하는 척도를 무늬없는토기에 두었듯이, 철기시대를 구분하는 유물로 철기가 아닌 청동기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게 바로 한국식동검이다. 한국식동검의 등장은 본격적인 철기시대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요령식동검.

한국식동검 연구는 그 원류를 요령식동검 문화에서 찾으면서 시작됐다. 우리나라의 청동기문화를 전·후기로 구분하는 척도로 동검이 쓰인다. 전기는 요령식동검문화로, 후기는 한국식동검문화로 구분이 가능하다.

요령식동검 문화는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일대를 중심으로 전개된 동검문화의 한 갈래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요령식동검과 관련된 문화는 중국 랴오닝에서처럼 다양한 청동이 등장하지 않으며, 극히 제한된 수량의 요령식동검이 확인된다.

그러나 후기의 한국식동검 문화 단계에 오면 청동기무기가 다양하게 나온다. 이 때의 한국식동검 문화는 한반도 전역을 아우르는 하나의 커다란 문화권이 된다.

한국식동검 문화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지난 1960년대 활발하게 전개된다. 1961년 김원용은 요령식동검이 한국식동검의 옛날 형식이라며 한국 청동기문화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듬해엔 정찬영이 한국식동검의 형태학적 개념은 압록강 이북의 중국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특히 일본인 학자인 아키야마 신고(秋山進午)는 한국식동검은 요령식동검에서 분리돼 발전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때 역시 1960년대이다.

이렇듯 한반도를 중심으로 등장하는 한국식동검의 특징은 조립식이라는데 있다. 한국식동검은 칼의 본체와 칼자루를 따로 만들어 조립하도록 했다. 다른 동검문화에서는 찾기 힘들다는 점에서 한국식동검만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칼자루는 청동제품도 있으나 대부분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썩어서 남아 있지 않다.

구좌읍 종달리에서 발견된 한국식동검.

그렇다면 제주에도 이런 동검문화가 있을까. 단 한 점의 한국식동검이 그 사실을 말해준다. 구좌읍 종달리에서 완전한 형태의 본체를 지닌 한국식동검이 발견됐다. ‘발굴이 아닌 발견이라는 점이 다소 특이하다. 흔히 유물은 고고학적 지표 발굴을 통해 얻어지지만 제주에서 나온 한국식동검은 이런 고고학적 사례와는 다르다. 지표에 의한 발굴이 아니라 돌무지에서 우연히 발견됐기 때문이다.

종달리에서 한국식동검이 발견된 건 지난 1988년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이 유물은 발견품으로 등재돼 있다. 당시의 기억을 가진 이들을 추적해서 확인한 결과 밭주인이 신고했다고 한다. 종달리에서 발견된 한국식동검은 돌무지에서 나왔다는 특징이 있다. 동검은 주로 분묘에서 발굴되지만 돌무지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제사유적일 수도 있다는 견해를 보이는 이들도 있다.

한국식동검의 시기는 형태로 분류를 한다. 학자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으나 칼의 등날의 길이를 제1기준으로 삼는다. 한국식동검은 시간이 지날수록 등날의 길이가 길어진다. 제주에서 발견된 한국식동검은 등날을 기준으로 하면, 한국식동검이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한국식동검의 전성기 때 것으로 보인다. 초기 철기시대에 해당한다. 당시는 탐라국이라는 정치체가 완전히 자리를 잡기 이전이다.

어쨌거나 제주에서는 동검이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그리기에 한국식동검은 대외 교류의 흔적일 수밖에 없다. ‘발굴이 아닌 발견으로 얻어지기는 했으나 종달리 한국식동검의 주인인지 궁금하다. 발굴된 유물이 아니라 우연히 버려진 걸 발견한 것이어서 그 정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지만 한국식동검 단계는 요령식동검 문화와 달리 한 무덤 내에 다량의 청동기가 함께 부장되는 특징이 있다. 이런 사실로 비춰보면 종달리에서 발견된 한국식동검의 주인 역시 일정 규모의 세력을 가진 인물이었음은 분명하다. 그건 탐라국이라는 정치체제에 앞서 강력한 권력을 지닌 이들이 존재했음을 알려준다.

<김형훈 기자 / 저작권자 미디어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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