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5 17:37 (목)
“삼양 지역 아우르던 권력층 위세 드러내는 최고의 작품”
“삼양 지역 아우르던 권력층 위세 드러내는 최고의 작품”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3.10.09 03: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역사 30選] <22> 삼한지역과 교류하며 수입된 옥환

독일의 언론인이며 대중적 고고학 저술가였던 쿠르트 빌헬름 마렉(1915~1972)으로부터 이야기를 좀 들어야겠다. 그의 필명은 쎄람이다. 그는 제신과 무덤과 학자들(우리나라에서는 낭만적인 고고학 산책으로 출간됨)이라는 책을 통해 고고학자들의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가 쓴 내용 가운데 이런 게 있다.

위대한 빙켈만조차도 카사노바의 형제에게 속은 일이 있다. 화가였던 카사노바는 빙켈만의 저서 미공개된 고대 미술작품들의 삽화를 그리기로 약속돼 있었다. 그런데 카사노바는 자신이 그린 3점을 배짱 좋게도 폼페이의 벽에서 따와 그린 것이라고 했다. 카사노바는 그럴싸한 이야기로 만들어 빙켈만을 속였다. 물론 빙켈만은 그의 저서에 카사노바의 이야기를 덧붙였다. 날카로운 비판력을 지닌 빙켈만이 그런 속임수에 우롱당할 정도이니 다른 사람은 말해 무엇하랴.”

미술사학의 창시자인 빙켈만은 희대의 방탕아 카사노바에 그렇게 놀아난다. 빙켈만과 카사노바의 이야기는 고고학자의 해석이 가져올 수 있는 오류를 말하는 건 물론, 고고학자의 해석이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고고학은 해석학으로도 불린다. 고고학자들은 고대인들이 제공한 자료를 파고들어 어떻게 진실에 가까울 수 있는지를 연구하는 이들이다.

제주시 삼양동에서 나온 '옥환'
이번에 소개할 제주역사 30옥환(玉環)’이다. ‘옥환은 옥으로 만든 고리 혹은 팔찌를 말하며, 일본에서는 옥천(玉釧)’이라는 단어로도 많이 쓴다. ‘옥환도 해석이 중요한 건 물론이다.

옥환은 우리나라에서 흔치 않은 유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5점 가량 나온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 가운데 제주도가 끼어 있다. 옥환이 발굴된 곳은 제주지역의 최대 거점 취락인 삼양동이다.

그런데 옥환은 자체 생산품이라기보다는 대외교류를 통해 흘러들어온 산물로 봐야 한다. 고대의 옥은 매우 귀하게 취급됐다. 옥으로 만들어지는 물품의 대부분은 중국 신강위그루자치구의 화전지방에서 나오는 연옥을 원료로 하고 있다. 화전지방에서 나오는 옥은 여러 색채를 띠는데 희고 온화한 것을 최고로 여긴다고 했다. 삼양동에서 나온 옥환도 연옥에 해당되며 은은한 색채가 으뜸이다.

그럼 대체 삼양동에서 나온 옥환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에 앞서 우리나라에서 나온 옥환의 모양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발굴되는 옥환 대부분은 단면을 잘랐을 때 육각형의 모양을 띠고 있다. 삼양동 옥환은 한사군이 설치됐던 낙랑지역에서 나오는 옥환과 가장 비슷하다. 삼양동 옥환은 직경 6.6cm로 북한의 전낙랑 유적에서 발굴된 옥환(직경 5.8cm)과 크기에서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몇 점뿐인 옥환이기에 그 쓰임새나 유통경로를 파악하는 건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당시 가장 많이 유통이 되던 화폐와의 상관관계를 분석하면 좀 더 쉽게 이해를 할 수 있다. 한나라 시대의 오수전이 출토되는 유적은 한반도 북부를 제외하면 남해안 지방이 주를 이룬다. 여기에 제주도도 포함돼 있다. 당시 한나라 화폐는 낙랑문화의 영향으로 유입된 것이어서 이런 경로를 따른다면 옥환 역시 낙랑을 통해 유입됐음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낙랑을 통한 직접 유입인지의 여부는 불확실하다. 분명한 건 한반도 남해안과 일본을 잇는 국제무역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범기(전남문화재연구원 선임연구원)제주도의 북쪽 해안은 지정학적으로 한반도 남해안 지방과 일본을 연결하는 최단거리이다. 남해안지방 군곡리와 늑도세력들과 일본을 경유하는 해로상에 위치해 중간기항지의 역할과 더불어 이들 세력들과도 활발한 대내외교류를 했음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된다고 밝히고 있다.

제주사람들은 삼한지역과 무역을 하며 '옥환'(사진) 등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 위지동이전도 제주도 고대 세력의 해상활동을 설명하고 있다.

마한 서쪽 바다에 주호라는 큰 섬이 있어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을 상대로 장사를 한다(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乘船往來巿買韓中)”<삼국지 위지동이전한조(韓條)’>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등장하는 주호는 제주도에 있던 세력으로 추정되며, 사료를 빌린다면 이들은 삼한을 상대로 무역을 펼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유물이나 사료에서 보이듯 제주도는 낙랑과 교류를 하던 삼한지역을 이어주고, 이를 더 확산시켜 일본과 직·간접적인 유통을 했을 가능성을 짐작하게 만든다.

이쯤에서 옥환을 바라보는 일본인들의 시각을 들여다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다. 일본에서 발굴된 대표적인 옥환은 교토 이와타키마치(岩滝町)의 오후로미나미(大風呂南) 유적에서 나온 출토품이다. 삼양동 옥환과 비교하면 크기는 좀 더 큰 9.7cm이며, 육각형의 상·하단 부분을 곱게 간 형태를 띠고 있다.

<교토신문>은 이와 관련 199962일자에 이와타키마치 유리팔찌인가, 중국산 칼륨유리제품인가?’라는 제목의 보도를 했다. 이 기사에서는 야요이 시대 후기의 일본은 용해된 유리를 중국 등으로부터 입수하고 있으며, 가공하는 기술과 세력을 가진 집단이 단고반도에 존재한 증거이다고 강조하고 있다. 일본 자체에서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기사이다. 이 기사가 진실인지는 모르겠다. 당시 고온에서 녹여내는 유리제품을 만들 기술이 일본 열도에 있었는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진실 여부를 떠나 오후로미나미 유적에서 나온 옥환은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일본 교토 아와타키마치의 오후로미나미 유적에서 나온 옥환.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그렇다면 제주에서 발굴된 옥환도 제주도 자체에서 만들었을 가능성은 없을까. 1%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이에 대한 답은 아니다가 적절하겠다. 그렇다고 했다간 빙켈만처럼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당시의 무역은 원거리 교류를 하는 이유에서 찾아야 한다. 고대의 무역은 서로의 유대를 다지거나, 지역 권력층의 위세를 드러내기 위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흔치 않은 옥환도 삼양동 지역을 아우르던 권력층의 위세를 드러내는 최고의 작품이었다. 많이 쓰이지도 않을 제품을 애써 만들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무역이라는 수단이 오히려 간편했다.

<김형훈 기자 / 저작권자 미디어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딥페이크등(영상‧음향‧이미지)을 이용한 선거운동 및 후보자 등에 대한 허위사실공표‧비방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되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삭제 또는 고발될 수 있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