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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권력층은 아니어도 그에 상응한 힘을 지닌 이들의 무덤
최고권력층은 아니어도 그에 상응한 힘을 지닌 이들의 무덤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3.11.22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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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역사 30選] <23> 제주에서 흔하게 발굴되는 옹관묘

복원시킨 옹관묘.
죽은 이의 몸, 즉 주검을 다루는 방법을 장법(葬法)’이라고 부른다. 매장방법을 말하는 장법을 잘 들여다보면 주검을 바라보는 태도를 바라볼 수 있다. 정착생활이 아닌, 수렵·채집을 하던 시대엔 흔히 주검을 야외에 그냥 내놓는 풍장(風葬)’이나 조장(鳥葬)’의 예를 보게 된다. 하지만 농경생활이 도입되면서 인간들은 한 자리에 머물게 되고, 주검을 다루는 방법도 달라진다.

정착생활은 인간들로 하여금 신분의 구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세력을 가진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의 구분이 차츰 만들어진다. 지배층과 피지배층은 살아서도 그렇지만 죽어서도 엄격한 차이를 드러낸다. 지배계급의 주검은 그렇지 않은 이들과 다른 대접을 받곤 한다. 청동기시대의 대표격인 고인돌도 그런 계층이 죽어서 대접을 받는 장법의 한 형태이다.

주검 처리는 그 위치가 땅 위인지, 땅 밑인지에 따라 그 당시의 세계관도 읽을 수 있다. 농경생활이 도입되면서 가장 큰 변화 가운데 하나는 땅 위가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으로 명확화 된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주검은 땅 위가 아닌, 땅 밑이라는 공간으로 들어간다. 장철수씨는 옛 무덤의 사회사에서 주검을 땅 속에 묻어 썩기를 바라는 지하장법은 살아 있는 사람과는 다르게 대접하고 있는 농경인의 집단의식을 잘 보여준다고 했다.

우리 조상들이 주검을 땅 속에 처리하는 대표적인 무덤은 널무덤이라고 부르는 토광묘. 사람이 들어갈 직사각형 모양의 땅을 파내고 거기에 주검을 넣는 형태이다. 좀 더 발달하면 목곽이나 석곽을 만들어 돌이나 흙으로 봉분을 만드는 무덤들이 만들어진다.

이번 글에서 주시하고 싶은 건 독무덤이라로 부르는 옹관묘. 흙으로 구운 옹기에 주검을 넣는 형태로, 옹기 하나를 그냥 묻는 경우도 있고 옹기 2개를 합쳐서 땅 속에 묻는 경우도 있다.

옹관묘는 어느 일부 지역의 산물은 아니다. 세계 각지에서 발견되는 매장 형태의 하나이다. 옹관묘는 우리나라 곳곳에서 발굴된다. 제주지역도 29개에 달하는 옹관묘가 발굴됐을 정도이다.

그런데 옹관묘의 주인이 누군지는 헷갈린다. 어른이 들어갈 크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제주지역에서 나온 옹관묘에 쓰인 옹기의 크기는 가장 큰 게 삼양동에서 출토된 것으로, 60에 지나지 않는다. 옹기 2개를 합한 경우에도 가장 큰 건 110이다. 이 정도의 크기는 도저히 어른의 것으로 상상할 수 없다. 제주지역에서 발굴된 29개의 옹관묘 가운데 이처럼 1m를 넘는 건 단 한 개에 불과하다.

삼화지구에서 발굴된 옹관묘.
중국의 유교 경전의 하나인 예기를 들여다보면 옹관은 하나라 때 사용했는데, 7세 이하의 어린이를 묻는데 쓴다고 돼 있다.

예기는 옹관을 두고 어린이의 것이라고 하지만 학자들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학자들은 대게 ‘2차장(二次葬)’에 관심을 두고 있다. ‘2차장이란 주검에서 뼈만 추려내는 경우이다. 뼈를 추려내는 경우는 화장을 하거나, 별도의 시설에서 2~3년간 주검이 썩을 때를 기다린다. 이 때 뼈를 깨끗이 씻기 때문에 2차장을 세골장(洗骨葬)’이라고 부른다. 옹관묘를 2차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이처럼 복잡한 단계를 거쳐야 한다. 화장을 하지 않을 경우엔 무덤 하나를 만들기 위해 수년을 기다라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

때문에 기자는 ‘2차장이라는 견해에 100% 공감을 하지 못하겠다. 옹기 자체를 무덤의 주요 재료로 쓴다는 건 막강한 권력을 필요로 하지만 어른의 무덤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은 되지 않기에 그렇다.

제주도에서 발굴된 옹관묘는 청동기와 철기시대를 넘나들고 있다. ‘탐라라는 국가가 나타나기 이전까지 옹관묘가 발굴되고 있다.

주목할 점은 옹관묘를 매장할 때 일정 규모의 분묘공간을 뒀다는 점이다. 살아있는 주거공간과는 다른 공간인 죽은 자의 공간인 분묘공간의 생성이다. 제주에서 옹관묘가 가장 많이 발굴되는 삼양동인 경우 옹관묘가 일정 간격을 유지하고 들어서 있기에 죽은자만의 분묘공간이 만들어졌다고 인식된다.

제주도의 옹관묘 분포도.
다시 돌아가서 누구의 것인가를 되짚어보자. 땅을 파서 만들어지는 토광묘는 옹관묘에 비해서 잘 드러
나지 않는 단점이 있다. 옹기는 구워서 만든다는 특징 때문에 오랜기간 썩지 않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옹관묘가 상대적으로 많이 보이는 건 이런 특징 때문으로 보면 되겠다.

그런데 당시 지배층의 무덤은 껴묻거리로 불리는 부장품을 으레 넣기 마련이다. 만일 옹관묘가 어른의 것이라면 옹관묘를 만들기 위해 들인 정성과 아울러 부장품이 있을텐데, 부장품은 거의 없다. 이와달리 삼양동에서 발굴된 토광묘에서는 껴묻거리로 당대 최고의 권력자만이 가질 수 있는 간돌칼(마제석검)이 나오기도 했다.

탐라국 이전의 정치체제 가운데 아주 강력한 권력자의 무덤으로 알려진 용담동 철기부장묘도 이쯤에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 묘는 적석목관묘로 주변에 6개의 옹관이 배열돼 있다. 또 이 묘의 바로 남쪽엔 석곽묘가 3개 발굴됐다. 적석목관묘의 남쪽 석곽묘는 경계석렬로 구분돼 있어 상관관계를 찾기는 힘들다. 대신 적석목관묘와 6개의 옹관묘는 경계석렬 북쪽으로 함께 배치돼 있어 관련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용담동 철기부장묘 유구배치도. 파란원이 최상의 지배층의 무덤이며, 주위로 옹관묘(붉은원)들이 배치돼 있다.
그렇다면 용담동 최고 정치세력의 묘 주변에 옹관묘가 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최고의 정치세력은 적석목관묘에 자신이 주검을 두고 있기에 옹관묘는 우두머리의 묘가 아님은 분명하다. 대신 옹관묘의 주인은 우두머리와 어떤 특수한 연관성이 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딸린무덤의 성격으로 지배자의 어린 자식들이거나, 지배자를 위한 특수목적에 의해 희생된 이들의 무덤일 수도 있지 않을까.

옹관묘는 일반화된 장묘의 형태는 아니다. 주검을 그냥 땅을 파묻으면 될 일을 옹기에 담는 정성을 감안하면 예사 무덤은 아닌 셈이다. 하지만 옹관묘는 껴묻거리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지배층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냥 땅에 묻히는 일반 민중도 아니었다. 옹관묘의 주인은 최상의 지배층에 견주지는 못하더라도 권력 주변에 있는 이들이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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