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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한나라 왕망대 화폐는 왜 유일하게 제주에서만 나올까”
“중국 한나라 왕망대 화폐는 왜 유일하게 제주에서만 나올까”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4.02.09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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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역사 30選] <24> 중국에서 들여온 교역품인 화폐와 청동거울

제주시 산지항에서 나온 오수전 등 중국 화폐.
무역은 오래전부터 있어온 인간의 자연스런 행동 양식의 하나이다. 다만 지금과 비교하면 경제규모가 다를 뿐이지 작은 이웃간, 작은 국가간 교역은 늘 있어왔다.

그러다 원거리 교역이라는 형태가 등장한다. 원거리 교역은 서로 동일한 정치체제가 아닌, 정치체제가 다르고 종족도 다른 이종집단간의 이동을 말한다. 거기엔 원료를 직접 교환하는 형태가 있는가 하면, 문화를 옮겨가는 것도 포함된다.
 
한반도는 아이러니하게도 고조선이라는 거대한 국가가 존재하면서 고조선 이남 지역의 사회와 중국 본토와의 관계는 막혀왔다. 그러다 고조선이 붕괴되고 거기에 낙랑을 비롯한 중국의 정치체제가 들어오면서 남쪽과의 교역이 순조로워진다. 고조선의 멸망이라는 점에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대목이지만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문화체제의 이동을 가능하게 이끈 요인이다.
 
그렇다고 한반도 전체가 중국의 정치체제와 교역을 한 건 아니었다. 한반도 이남에 또다른 강력한 정치체제들이 등장하면서 낙랑과의 교역은 해상 교통이 이뤄지는 해안가를 위주로 진행된다. 거기에 제주도도 빠질 수 없다.
 
지난 1928년 건입동 산지항 축조 공사를 하는 도중 해안 절벽에서 다량의 화폐가 발견된다. 모두 중국에서 사용한 화폐였다. 오수전(五銖錢) 4, 화천(貨泉) 11, 대천오십(大泉五十) 2, 화포(貨布) 1개 등이었다. 이들 화폐는 후한과 신나라 왕망시대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들 화폐가 언제 제주에 들어왔을까.
 
오수전인 경우 800년 가까이 중국에서 사용되던 화폐로 동북아시아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만들어진 시기도 전한 무제 5(기원전 118)에서 당나라 무덕 4(621)까지이다. 개수만도 280억개가 넘는다.
 
전한시대는 지역별로 동전을 자유롭게 만들면서 질량이 불균등해지고, 가치도 떨어지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제는 오수전을 국가주도로 만들도록 하면서 몰래 만드는 이들을 강하게 처벌했다. 무제는 오수전으로 통일하기 위해 수십만명의 목숨을 앗았으며, 목숨을 살려달라며 자수한 이는 100만명을 넘을 정도였다.
 
그러나 유씨 왕조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은 왕망은 신나라를 만들고 3차례의 화폐개혁을 단행한다. 왕망당시 만들어진 화폐는 대천오십(서기 7~14), 화천·화포(14~40) 등이다. 이를 통해 보면 대천오십·화천·화포 등이 만들어진 기간은 매우 짧은 걸 알게 된다.
 
중국사학자인 서연달 등이 쓴 중국통사를 보면 왕망대 화폐가 활용되지 못한 이유가 있다.
 
“3번의 화폐개혁을 단행하는데 화폐의 무게가 일정치 않고 가격책정도 불합리했다. 때문에 매우 심한 경제혼란이 조성됐다. 소위 한 번 동전을 바꿀 때마다 백성은 파산하거나 형벌에 빠졌다. 화폐 파동으로 인해 상공업이 파산하고, 민간은 몰래 동전을 만드는 일이 많아졌다.”(중국통사의 일부)
 
왕망대의 화폐는 24년 신나라 멸망 후에도 잠깐 만들어지기는 했으나 오래지 않아 오수전으로 대체된다.
 
산지항에서 발굴된 중국 화폐들. 이들 가운데 제주에서만 나온 게 있다. 왕망대 화폐로 맨 왼쪽의 '화포'와 오른쪽 맨 아래의 '대천오십'이다.
그렇다면 제주에서 오수전과 함께 발굴된 왕망대의 화폐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특히 대천오십과 화포는 산지항에서 발굴된 게 왕망대 화폐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출토품이다.
 
때문에 왕망대의 화폐가 경제혼란 등을 가져와 오래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산지항 출토품은 기원전 1세기의 것으로 보는 데는 무리가 없을 듯하다.
 
문제는 누구와 교역을 했을 것인가이다. 더불어 화폐는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도 궁금하다.
 
오수전과 왕망전은 낙랑이 지배를 한 평안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해안지대에서 발견된다. 일본에서도 대부분 해안지역에서 이들 화폐가 다량으로 나오고 있다. 280억개가 넘게 만들어진 오수전이 한반도 내륙에서 거의 발굴되지 않고, 해안에 집결하고 있다는 점은 화폐로 통용되기보다는 다른 기능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권력자의 껴묻거리 또는 권력자의 위세를 나타내는 제품으로 통용되지 않았을까. 당시 한반도는 화폐를 이용한 교역단계로 보기는 힘든 단계였다.
 
현재 학계에서는 고대의 대외교역을 낙랑-마한-변진한-(일본)로 이어진다고 보고 있다. 제주도도 낙랑과의 직접 교역은 아니지만 이들 교역루트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학계의 논리는 왜 제주에서만 왕망대의 화폐가 유일하게 발견되고 있는지에 대한 답은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나오지 않는 화폐가 제주에서 나왔다면 낙랑과의 직접교역이나, 제주도와 한나라와의 관계도 새롭게 규명될 필요가 있다.
 
중국 한나라 청동거울.
산지항에서 나온 화폐와 아울러 2개의 청동거울도 제주도 정치체제가 외부와 직접 교류한 흔적을 보여준다. 한나라식 청동거울은 영남지역인 경우 수장급 무담에 껴묻거리로 사용될 정도로, 상위계층만 사용하는 귀한 제품이다. 제주도 역시 그런 최상 계층이 존재해 교역에 직접 참여했음을 역사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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