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특집 > 해외 특파원 보고 | 기획특집
해외 특파원 보고
침묵을 택했던 조선인에게 ‘한편의 글’이 추도가 될 수 있기를
[특파원 고하나의 일본 이야기] 마츠시로 대본영을 가다<2>
데스크승인 2014.12.08  15:38:53 고하나 특파원 | mediajeju@mediajeju.com  
   
비공개 부분에 남겨진 어느 조선인의 낙서. 일본에 남겨진 문헌에 따르면, 한국 학자의 의견을 따라 ‘장례를 하는 사람’일 것으로 추정.

일본에 온지 10년이 되어간다. 그리고 그10년 동안 한일간 정세가 정치적 혹은 경제적 이유로 몇번의 풍랑을 겪는 것을 봐왔다. ‘딱히 이유없이’ 일본을 혹은 한국을 폄하하는 사람들을 차치하고, 현실적으로 한일관계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특히 역사적 사실을 공론화 하는 것에 민감하다. 직접적으로 얘기하자면, ‘역사를 들춰내는 것’에 조심스럽다.

‘역사문제’를 언급하는 것과 함께 한일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되는 것을 오랜시간 봐온 ‘내가 먹고 사는 데 양국의 관계가 연관이 있는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변하게 되고, 때로 많은 것들에 대해 침묵하게 된다. 그 침묵이 설령 자발적인 것이든 강요된 침묵이든.

숨겨진 이곳의 역사 속 조선인들. (감히 이해하는 시늉을 할 수 있겠느냐마는)
‘이곳’에 남겨졌던 어두운 역사 마지막 페이지의 그 사람들은 ‘침묵해야 할 것’과 ‘침묵해선 안되는 것들’에 대한 많은 갈등 속에 살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가장 많이 택한 ‘최선의 삶의 방식’은 벙어리가 되는 것이었다.

“1945년 8월, 일본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했습니다. 마츠시로 대본영의 공사도 패전으로 인해 중단되게 되었고요. 건설을 위해 운반된 방대한 자재도 관계했던 회사나 주변의 시나 동, 마을 등으로 불하(인수)되었습니다. 군대는 해산이 되어, 건설회사 사람들도 줄줄이 마츠시로를 떠나갔습니다. 공사에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는 고국으로 귀국, 혹은 일본내 각지로 흩어졌습니다. 패전으로부터 얼마 안되는 동안 마츠시로는 폐허가 됐습니다. 1960년경, 마츠시로에 남은 조선인은 희박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쓸모없는(無用) 긴 이야기’로 시대의 흐름으로부터 떨어져나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갔습니다.”

침묵하지 않았던 유일한 증언자, 고(故) 최소암(1919~1991)씨의 증언 중 한 대목이다.

그는 지하방공호의 근처를 떠나지 않고 이곳에서 살았다. 먹고 살 수 있는 일이 없었고, 생활이 힘든 적도 여러번 있었지만 도로공사등의 일을 찾으며 삶을 이어갔다. 그리고 일본인 여성과 결혼해, 슬하에 4명의 자식이 있었다.

부탁하건대 앞으로 소개할 고인의 이야기들을 단지 응어리, 고통, 아픔의 하소연으로 듣지 않았으면 한다. 또한 거창하게 ‘역사의 증언’이라 하지도 않겠다. 단지 사진과 문자만으로 접할 수 있었던 그의 삶은, 여느 역사의 기록과 또다른 의미의 울림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인 희생자 추도 평화 기념비.

입구의 우측, 한글로 된 기념비를 처음 보았을 때의 숙연함과 방공호를 보고 나온 뒤 다시 기념비 앞에 섰을 때의 큰 먹먹함.
그 큰 차이는 바로 비공개 구역의 두 낙서를 찍은 사진을 보고 나서부터였다.

전쟁 후에 최소암씨는 마츠시로 방공호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마츠시로 대본영’에 대해 입을 열기 시작한 것은 한일 정세가 변하기 시작해서 일본 국내의 평화운동이 강해지기 시작한 1970년대부터였다.

   
비공개 부분에 쓰인 문자. ‘대구(大邱), 대구부(大邱府)’ 라고 된 어느 조선인의 낙서. 떠나온 고향이었을까.

그리고 전후 40년이 되는 1985년. “마츠시로 대본영을 ‘과거의 역사에 배우고, 한일 양국 민중의 진실한 우호와 연대를 발신하는 평화사적’ 으로 하자” 고 입을 모은 나가노의 고등학생과 시민들의 보존운동이 시작됐다.

이 운동이 커져가면서 최소암씨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체험을 얘기하기로 마음먹는다. 공사에 관한 일, 식사, 숙사는 어땠는지, 희생자에 관련된 것들, 자신의 체험을 일본어로 열심히 말해왔다. 때로는 지하 방공호를 직접 안내하고, 작은 손전등의 불빛 뿐인 어두컴컴한 방공호 속에서 공사에 대한 상황과 사고로 인해 죽었던 동료에 대해서도 증언했다. 그의 성실한 증언은 듣는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줬다고 전해진다.

이후 고인은 방공호 공사로 인한 것이라 생각되는 폐병과 작업중에 당한 린치(집단 폭력) 후유증이라 보이는 요통으로 고통받다가 1991년 3월 17일 병으로 급사했다.

조산 지하 방공호 일부가 나가노시로부터 보존돼 일반에 공개되기 반년전의 일이었다.

새삼스레 추도(追悼)의 의미를 찾기 위해 국어사전을 펼쳐 들었다. ‘추도(追悼)-죽은 이를 생각하며 슬퍼함’
나는 정녕 ‘이름 모를’ 고인을 생각하며 마음속 깊이 슬퍼한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었는가.

이 가난한 한편의 글이 추도가 될 수 있기를.
읽는 이들로 하여금 ‘슬픔’에 이르지는 못할지라도 ‘그들’이 ‘이곳’에 있었음을 전할 수 있기를. 한번쯤 생각하게 할 수 있기를.

고(故) 최소암씨를 비롯해서 ‘침묵’을 선택했던 수많은 조선인들의 추도를 마지막 페이지가 아닌 시작하는 페이지로 정한 이유는 하나다.

숨은 역사의 취재가 ‘아픔의 시간을 파헤쳤다’는 이유로 결국 ‘단절’을 불러오는 것이 되어선 안되기 때문이다. 고인들의 침묵을 욕되게 하지 않는, 역사와의 악수가 되길 간절히 바라며.

고하나 특파원의 다른기사 보기
[관련기사]
여전히 ‘조선인 강제징용’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
의견나누기(0개) 운영원칙 보기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0 / 최대 1000바이트 (한글 250자)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SPONSO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