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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전 고교생의 열정으로 드러난 전쟁 역사의 실체
[특파원 고하나의 일본 이야기] 마츠시로 대본영을 가다<3>
데스크승인 2014.12.09  15:57:58 고하나 특파원 | mediajeju@mediajeju.com  

휙, 뭔가가 빠르게 지나갔고 카메라가 흔들렸다. 순식간에 일행을 지나간 검은 물체에 놀라 물어보니 박쥐라고 했다. 그래. 이곳에 불빛이 들어오기 전까지, 몇십년간 정적 속에 이곳을 살고 있던 건 저 박쥐들이었다. 불청객을 향해 경고하듯 인기척을 내고 간 박쥐는 다시 조용해졌다.

   
   
 

안전 장치가 되어 있는 곳과 생각보다 꽤 넓은 길도 있었고, 머리가 천장에 닿을 듯 좁은 곳도 있었다. 비공개 구역은 철조망으로 막혀 있어 손전등을 비춰보며 그 깊이를 가늠해야 했다. (이미 붕괴가 된 곳 또한 있으며, 위험지역은 비공개 구역으로 출입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이곳이 일반에 공개된 이유는 이 마츠시로를 평화의 의미를 담는 역사의 현장으로 재조명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고등학생들로부터 시작됐다.

   
마츠시로 대본영을 안내하는 이가 작업 중에 중단됐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착암기(굴착기의 일종) 막대가 박혀있는 상태. 작업했던 그대로 남겨 있다.

전후 40년, 마츠시로 대본영에 관심이 쏠려 있을 때 이것을 더욱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은 한 고등학교의 향토연구반 학생들이었다. 시노노이아사히고교(篠ノ井旭高校, 현재 나가노슌에이고교) 학생들은 1960년 6월에 오키나와로 수학여행을 갔다. 전쟁을 모르는 그들에게 오키나와는 그저 일본의 최남단 섬에 불과했다. 하지만 우연히 오키나와의 지방신문에서 전쟁 중에 있었던 이곳의 기사를 접했다.

그 기사를 본 학생들은 급히 이곳을 견학하기로 했다. 전등을 한손에 쥐고 방공호 안으로 들어갔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퀘퀘한 냄새가 코끝을 찔러왔다. 흙은 적붉은 색으로 변색돼 있었다.

“시체가 방치됐던 곳이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오키나와와 나가노현은 앞으로 나올 ‘본토결전’을 이유로 태평양전쟁에서 큰 연관이 있는 곳이다. 일본에서 ‘제주’를 설명할 때 보통 편의상 (지리적인 이유로) “오키나와 같이 남쪽에 있는 곳” 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잠깐 오키나와에 대해 이야기하고 넘어가겠다. 사실 오키나와현은 국가로부터 끊임없이 배신당한 사람들의 역사가 있는 곳이다. 오키나와현에 다녀와 현지인과 그 아픔에 대해 듣고 온 50대 여성인 코이케씨의 말에 따르면 오키나와 사람들의 분노와 슬픔은 다른 지역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것이라 한다.

본래 오키나와는 일본 땅이 아니었다. 동아시아의 중계무역지였던 류큐왕국은 1879년 오키나와현으로 개편하여 일본 영토로 병합됐다. 류큐의 지배층은 일본 정부에 대한 불복종과 비협력운동을 조직하고 청에 원군을 요청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고, 일본 땅이 된 지 불과 60년 만에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최후의 격전지가 돼버렸다.

1945년 3월 일본군은 미군과 일본 본토에서 싸우는 ‘본토결전’을 계획하고 미군을 가능한 한 오키나와에 오래 붙잡아 두기 위해 지구전을 계획한다. 미군은 군함 1500척으로 오키나와를 포위하고 5만의 대병력으로 공격했다. 3개월에 걸친 지구전으로 오키나와는 철저히 파괴되었으며 주민 60만 명 중 4분의 1이 목숨을 잃었다.

여기서 나오는 ‘본토결전’을 위해 만들어진 계획이 바로 이 마츠시로 대본영이다.

   
많지 않은 작업 흔적이지만 선명히 남아 있다.

사실 오키나와 주민의 죽음은 미군의 공격보다 일본이 저지른 국민 학살인 경우가 더 많았다 한다. 일본군이 강요한 집단 자결과 함께 미군의 포로가 될 경우 일본군의 정보를 제공할 스파이가 될지 모른다는 의심으로 인한 학살 등으로 실제 일본군에 의해 죽은 사람 수가 미군에 의해 죽은 사람 수보다 많았다.

천황제 국가에 익숙지 않은 오키나와 주민이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며 자결해야만 했다. 1945년의 오키나와는 ‘일본 속 식민지’나 다름없었다.

2007년 일본 문부과학성은, 오키나와 집단자결 사건을 다루며 “일본군이 강제로 집단자결을 명령했다” 고 쓴 교과서에 대해 ‘강제로’란 표현을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분노한 오키나와 주민 12만 명은 거리 시위를 하며 의견 철회를 주장했다.

이렇듯 아직도 ‘대학살’이라는 트라우마를 가지고 사는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있어서도 ‘마츠시로대본영’은 지워선 안될, 잊혀져선 안 될 전쟁유적인 것이다.

   
마츠시로 대본영 내부.

“여기도다!” “여기도 그렇다!”

학생들은 시체가 방치됐던 흔적을 찾아냈고, 이들의 외침에 더이상 방공호를 따라 움직이는 것은 힘들어졌다. 그들은 오키나와의 전쟁이라는 역사를 직시하는 것을 시작으로, 자신들의 손으로 전쟁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전쟁이라는 것이 그저 먼 일이 아니라, 그들이 서 있는 바로 이 자리에도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이다.

수학여행에서 돌아온 그들은 전쟁에 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일본은 세계를 무대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그 흔적은 아직 오키나와에 있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살고 있는 나가노에는 전쟁이 없었던 것일까?

학생들의 지하방공호 연구는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자료를 모으고 건설공사에 관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하여 8월 29일, 조산 지하고에 들어가 조사를 시작했다.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전쟁의 아픔을 보여주는 이곳 마츠시로 대본영을 평화의 심벌로 보존하는 것이 도리가 아닌 것인가.

그렇게 나가노현 시장에게 편지를 쓰는 것으로 어둠뿐인 이곳에 작은 불빛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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