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특집 > 해외 특파원 보고
해외 특파원 보고
대본영 공사에 가담한 일본인 “우리도 피해자다”
[특파원 고하나의 일본 이야기] 마츠시로 대본영을 가다 <6>
데스크승인 2014.12.16  08:44:40 고하나 특파원 | mediajeju@mediajeju.com  

지금부터 얘기할 것은 ‘마츠시로 대본영’이 아니다. 바로 ‘마츠시로’라는 작은 마을의 이야기다. 누군가에게는 비단 ‘과거’일 뿐인 일들이 여전히 ‘현재’인 그들과의 대화.

기억하는가. 지난 1편에서 <시나노마이니치신문>이 보도한 ‘강제적으로’ 의 안내문 표기 삭제에 관한 보도 말이다. 여기서 ‘역사 왜곡이다’를 외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보자.

도대체 왜 ‘평화운동’을 시작한 뒤 일반 공개를 했고, 조사까지 했으면서 이제 와서 그걸 번복하는 건지. 이상하지 않은가? 만약 이 의견에 동의한다면 당신은 이미 이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여 줄 준비가 되어있다고 생각한다.

국가와 민족을 넘어 ‘작은 마을의 주민’이야기를 들어보자.
국가와 민족을 넘어설 수 없다면, 윈도우창 ‘닫기’를 눌러주기 바란다.

   
마츠시로 대본영은 3개의 산에 둘러싸여 있다.

그곳은 그들의 삶의 터전이다. 그 산 근처에 살았고, 또 살고 있다. 마츠시로 대본영은 세 개의 산 속에 있고, 그네들의 삶도 그 산과 함께 해왔다.

불편한 진실과의 조우(遭遇).
그것은 우연한 맞닥뜨림에서부터 시작됐다.

   
무학산 서부에 뚫린 지하고 입구. 현재는 입구가 봉쇄된 상태. 무학산 암석의 강도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봉쇄된 입구. 드나들지 못하도록 막혀버린 수많은 기억들.
시간은 흐르고, 저렇게 막혀버린 채 ‘그들’의 기억조차 봉인된 듯 보였다.

처음 <마츠시로에 무슨 일이 있었나!> 라는 책을 접했을 때 저 입구의 봉인이 풀린 것과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글은 말보다 강하다고 했는가. 만약 지역 주민들이 서로 옛이야기 하듯 주고받는 말로 끝났을 뿐이었다면 이렇게 큰 의미로 다가오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뭐가 그리 답답했기에 90여명의 목소리를 이리도 구석구석 담아놓으려 했을까.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때로 ‘자료’ 분석과 ‘숫자’가 나타내는 결론보다 더 많은 것들을 ‘내 몸으로’ 기억한다.

다른 자료들과 비교해 봤을 때 도대체 어떤 것이 진실이었는지 혼동이 올 정도로 그들이 몸소 겪은 기억의 단편은 샅샅이 기록되었다. 마츠시로 대본영에 대해 객관적인 증거는 극히 적다. 그렇기에 주민들의 증언이 전부 사실이라고 볼 순 없다. 하지만 한둘이 아니라 총 90여명의 기억은, 전체로서 당시의 상황을 어느 정도 보여주는 것이라는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 시민단체와 지역주민간의 마찰

마츠시로를 ‘가해자 책임의 원점’으로 하자는 평화운동의 거점으로 만들자는 것에 대해 지역주민들은 위화감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들의 희생은 무시되고 ‘조선인 강제연행, 강제노동’으로 한데 묶여 논의되는 것에 대한 견딜 수 없는 생각들. 그리고 마음이 통했던 조선인들과의 기억. 단지 조선인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혹한 체험을 진지하게 들어 주는 것 또한(전쟁이란 어리석은 행위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남겨두어야 할) 다음 세대와의 대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전쟁이란 무엇일까. 국가란 무언가. 국가 권력의 횡포란 어떤 것인가.

수십 년을 걸친 시민단체와 지역주민들간의 ‘틈’은 마찰을 불러일으켜 왔고 그들의 말은 묵살되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약자였던 조선인 노동자 고(故) 최소암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더욱 ‘함께 전쟁을 겪으며 당시 공사 작업’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증언은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끝나버렸다.

주민들이 생각하는 조선인과의 생활은 좋았던 기억이 많다. 이는 주민들이 조선인 노동자 그리고 가족들과 어떻게 살아왔는지 수많은 증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니시죠(西条)지구(1956년 마츠시로에 편입) 주민들이 조선인들에 대해 차별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적어 보인다. 다만, 생활습관의 차이로 인한 시각차는 있었다. 예를 들어 “소를 잡아서 죽이고 내장을 생으로 먹었다”(현재는 한국식 고기집-야키니쿠야에서 흔히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 라든지 “세탁을 하는데 옷을 비벼 빠는 게 아니라 세탁방망이로 두드렸다”, “아이를 등에 업을 때 엉덩이 부분까지 내려 업었다” 둥.

   
카와세 하스이(1883~~1957)가 황해도의 ‘개성’을 그린 작품. 아이 업은 엄마의 모습 속에서 일본인이 당시 아이 엄마를 어떻게 봤는지 유추해 볼 수 있다.

게중에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조선인들이 강제연행 됐다고 생각진 않는다. 우선, ‘강제연행’이란 말이 없었다. 일본인과 같이 ‘징용’일 뿐이었다. 그 당시는 조선 사람도 같은 일본인 이었다. 조선인들 중에서도 징병에 지원해서 군대에 온 사람도 있다. 그리고 마츠시로 구멍을 파는 것도, 우리는 노동봉사로 급료를 받은 것도 아니었는데 조선인들은 급료를 받았다. 그러니 조선인 간부들은 꽤 괜찮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기도 먹고, 돈도 가지고 있었다. 오히려 내가 집도 빼앗겼지, 돈도 없었지, 먹을 게 없는 날도 있어서 조선인 간부가 식량을 나눠 주기도 했다. 우리들도 피해자다.”

이 의견은 한 개인의 의견일 뿐이다. 다만 마지막 말,
“우리들도 피해자다”라는 말은, 지역 주민 대부분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마츠시로를 조명한 <마츠시로 지하 대본영- 증언이 밝히는 조선인 강제노동의 기록>이란 자료에는 당시의 군부관계, 주민, 공사에 관계된 조선인, 총 25명의 증언이 들어있다. 하지만 증언자의 고정관념, 기억의 차이, 추측, 사상의 반영 등을 고려했을 때 실증적 자료와 증거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제부터 소개할 내용은 전쟁을 겪었던 그 시절 ‘작은 마을 사람들’의 기억이다. 이제부터 ‘마츠시로의 진상’을 또 다른 시각으로 알리려했던 그들의 대화 내용을 공개한다.

고하나 특파원의 다른기사 보기
의견나누기(0개) 운영원칙 보기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0 / 최대 1000바이트 (한글 250자)
SPONSO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