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4 17:54 (수)
탐라의 지배세력이 왜 동굴에 집단적으로 살았을까
탐라의 지배세력이 왜 동굴에 집단적으로 살았을까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4.12.20 12:43
  • 댓글 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역사 30選] <28> 세계자연유산 ‘용천동굴’

세상엔 수많은 수수께끼가 존재한다. 쉽게 풀리면 다행이지만 그리 쉬운 게 아니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역사는 어찌보면 거대한 수수께끼 덩어리다. 그 수수께끼 덩어리를 하나하나 뜯어가며 분석하는 일들이 역사학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전체 역사의 극히 작은 부분이다. 사료를 통해, 고고학적 유물을 통해 분석하면서 나름의 역사는 하나의 체계를 갖추게 된다. 그렇다고 그 역사가 100% 맞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100%는 아닐지라도 사실(史實)에 근접하도록 하는 학문이 역사이다.

역사라는 어휘는 인간의 과거를 탐구하는 사실을 망라한다. 역사를 좁은 의미로 쓸 때는 문자로 기록된 과거의 시대를 말한다. 하지만 고고학은 문자로 기록된 자료에서 제공받는 학문이 아니라 물질적 자료로부터 인간의 역사를 서술하는 학문이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고고학의 물적자료는 더욱 중요해진다.

용천동굴 조사 모습.

지난 2005년 5월이다. 구좌읍 월정리 일대에서 도로 전신주 설치 공사를 하던 중 동굴이 발견된다. 우연이었다. 발견된 동굴은 용천동굴로, 거문오름용암동굴계의 일부이다. 이 동굴은 2006년 천연기념물 제466호로 지정되고, 이듬해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다. 용암동굴에서 종유석과 석순이 발달한 동굴로,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그런데 동굴 발견으로 그친 게 아니었다. 세계자연유산이라는 이름보다 더 희귀한 걸 지닌 동굴이었다. 그건 2009년부터 2010년까지 2년간 동굴 내부를 발굴한 결과로 나온다.

용천동굴은 2.6㎞이며, 호수의 길이를 포함하면 3.4㎞에 달한다. 이곳 용천동굴 61곳 지점에서 통일신라 시대의 유물이 쏟아졌다.

통일신라는 당의 세력을 물리친 676년 이후가 되며, 935년까지 존속된다. 용천동굴 발굴에서 나온 토기와 철기의 편년을 따진 결과 8세기를 전후한 극히 한정된 시기임이 밝혀졌다.

탐라가 신라의 세력권에 포함된 건 백제의 멸망 이후가 된다. 탐라는 684년 신라로부터 이두를 배워오는 등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8세기를 전후로 신라와의 본격적인 교류가 이뤄진 셈이다.

따라서 용천동굴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탐라가 신라의 세력에 본격적으로 포함되면서 받아들인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용천동굴에서 나온 각종 토기류.

특히 통일신라 토기는 제주도에서 자체적으로 제작된 게 아니라 전량 신라로부터 수입됐다. 통일신라 토기들이 출토된 곳은 제주시 용담동 제사유적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용담동 제사유적 등지에서 발굴된 통일신라 토기의 수량은 많지 않다.

반면 용천동굴에서 나온 통일신라 토기들은 원형으로 복원된 것만 하더라도 22점이나 된다. 단일 유적으로는 제주에서 가장 많이 발굴됐다. 용천동굴에서 나온 유물들은 제주시 용담동의 제사유적 유물들과 많이 닮았다. 시기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다만 왜 동굴에서 발굴됐는가에 있다.

게다가 통일신라 시대 토기들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어느정도 지배계층에 포함돼야 만질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 토기를 신라에서 수입하려면 경제력은 물론, 한 지역에서 막강한 권력을 지닌 이들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왜 그런 세력들이 동굴로 왔을까. 용천동굴에서 동물뼈는 발굴되지만 당시 살던 이들의 유골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유물 역시 8세기 전후의 것들만 나올 뿐이다. 동굴에서 어느정도 살다가 나갔다는 점이 확인된다.

문제는 왜 동굴에 들어왔을까. 용담동 제사유적을 들여다보면 제사용도로 통일신라 토기를 많이 사용한 흔적이 있다. 용천동굴에 들어온 이들도 동굴내에서 일종의 의례를 치른 건 아니었을까.

용천동굴내 호수 바닥에서 나온 유물들.

특히 제주지역 다른 곳에서는 없는, 이곳 용천동굴에서만 나오는 유물이 있다. 바로 액체류를 담을 때 쓰는 ‘장군’이다. 장군과 함께 병 및 항아리류 등이 많다는 점은 물 등을 담아서 이동시켰다는 점을 알게 된다.

이 동굴엔 또한 낙반석 위에 소형 돌을 올려놓은 흔적이 있다.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쌓은 것으로 방사탑의 모습을 연상케 만든다.

동굴 하류 808m 지점의 서쪽 벽면엔 ‘火川’이라는 한자와 함께 별과 삼각형 등 각종 무늬도 나타난다.

액체류의 이동이 많았고, 일정시기에만 존재하고, 상위 계층들이 제례용으로 많이 쓰던 토기의 무더기 발굴. 이런 건 뭘 말하는 걸까. 지배세력에 밀린 이들이 잠시 동굴에 피신을 한 것일까, 아니면 그들 세력이 잘 되게 해달라고 비념을 하는 특정한 의례를 행한 것이었을까. 사료는 없이, 물적자료 뿐이니 쉽게 풀지 못할 수수께끼다.

<김형훈 기자 / 저작권자 ⓒ 미디어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딥페이크등(영상‧음향‧이미지)을 이용한 선거운동 및 후보자 등에 대한 허위사실공표‧비방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되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삭제 또는 고발될 수 있음)
댓글 3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김형훈 2014-12-24 18:06:16
많은 관심 기울여주셔서 감사합니다. 후속 기사도 준비중입니다. 기대에 부응하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벌써... 2014-12-24 18:03:48
부제목이 제주역사 30선인데.. 몇 회 안 남았네요. 후속 기획기사도 부탁드립니다

관심이 2014-12-23 23:40:43
관심이 많은지라, 열심히 읽었어요. 이런 내용이 많이 알려져서 많은 이들이 탐라사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는 것도 언론의 중요한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김형훈 기자,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