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6 17:57 (화)
바람의 선물 사구를 보다
바람의 선물 사구를 보다
  • 고희범
  • 승인 2015.03.19 16: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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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범의 제주이야기] 제주포럼C 제49회 제주탐방 후기

겨울은 저만치 물러가고 어느 새 봄 햇살이 따스하게 우리 곁으로 다가선 3월. 오름에는 겨우내 찬 바람을 피해 숨어있던 꽃들이 땅거죽을 뚫고 솟아나기 시작했다. 해바라기를 하려면 잎을 떨군 나무들이 새싹을 내기 전 급하게 고개를 내밀어야 할 것처럼 아직은 복수초는 아침 저녁으로 차가운 날씨에도 꽃망울을 활짝 터뜨렸다. 고운 자태를 뽐내기 보다 수줍은 듯 꽃잎을 드러낸 봄의 전령은 목청껏 이미 겨울이 물러갔음을 소리치고 있다. 제주의 모진 겨울바람을 이겨낸 봄꽃과 함께 바람이 준 선물 바닷가 모래언덕을 돌아보기로 했다.
 
'사구'(砂丘)라는 한자이름보다 훨씬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모래언덕'은 그 생성과정이 제주와 육지가 다르다.
우선 모래부터 다르다. 육지는 암석이 대부분 화강암과 변성암류로 돼 있어서 높은 산의 화강암 덩어리에서 깨져 나온 큰 돌덩어리가 빗물에 쓸려 강을 타고 굴러 내려오면서 갈라지고 깨져 점점 작아진다. 바위가 자갈로 변하고 더 작게 부서지면서 점점 더 작아져 모래가 된다. 모래의 성분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부분 석영이 주성분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모래가 바다에 이르러 모래 해변을 만든다(두산백과사전). 모래언덕은 해변의 모래가 해풍에 의해 다시 바닷가 근처 육지로 올라와 만들어진다.
 
제주의 모래는 대부분 패각(貝殼), 조개 껍데기다. 제주도의 모래언덕에서는 조개 껍데기가 발견돼 지각변동에 의해 바다의 지각이 솟아오른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해수면의 변동에 의한 것이다. 안웅산 박사(지질학)에 따르면 제주도에서는 3천년 전 해수면이 내려간 적이 있었다. 이 때 해변의 조개 껍데기들이 드러나게 됐고 조개 껍데기로 이루어진 모래가 해변에 쌓여있다가 해풍에 날려 올라오면서 모래언덕이 만들어진 것이다.
 
해안가 모래언덕에는 해안사구식물인 숨부기낭(순비기나무) 등이 뿌리를 내리면서 모래를 잡아준다. 모래언덕이 형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이곳에서 자라는 식물의 뿌리와 함께 가지가 모래를 덮어 바람에 날리는 것을 막아준다. 해안사구는 파도의 힘을 줄여 바닷가 모래사장의 모래가 바다로 빠져나가는 것을 방지한다. 또 마을쪽으로 모래가 날리는 것도 막을 뿐 아니라 해일 등의 피해를 막는 자연방파제 구실을 한다. 
 
제주도에는 이호해수욕장, 협재해수욕장, 사계해수욕장, 중문해수욕장의 사구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최근 모래언덕 위로 해안도로를 만들고 방파제를 쌓으면서 해안 모래언덕이 사라지고 있다. 동시에 도로나 방파제 등 인공구조물로 인한 모래사장의 모래 유실도 심각해지고 있다.

모래가 유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천을 덮어놓은 김녕 성세기해변.

구좌읍 김녕리 성세기해변은 하얀 모래와 맑고 파란 바닷물이 아름다운 해변이다. 모래사장도 넓어 해수욕장으로서도 뛰어나다. 그러나 해안사구 위에 방파제가 설치되면서 모래언덕의 대부분이 사라졌다. 이 때문에 해수욕장의 모래도 바람에 날려 주변도로와 밭을 뒤덮고 파도에 쓸려나가는 수준이 심각하다. 결국 모래사장 전체를 천으로 덮어놓았다.

해수욕장과 모래언덕 사이에 도로를 내고 모래언덕에는 옹벽을 두른 김녕성세기해변. 해수욕장의 모래가 보행로를 덮었다.
 

그래도 바위에 이어진 모래언덕은 길을 내거나 방파제를 쌓을 자리가 아니어서 살아남았다. 해안사구식물 숨부기낭으로 가득 채워진 모래언덕은 모래가 유실되지 않은 상태로 튼실하게 버티고 있다. 우리나라 중부 이남과 제주도의 바닷가 모래땅에 자라는 숨부기낭은 바닷물을 뒤집어쓰고도 잘 자란다. 숨부기낭은 늦여름에 보라색 꽃을 피우고 열매는 만형자(蔓荊子)라는 이름의 약재로 진통, 소염, 혈압강화, 신경통 치료에 쓰인다. 열매를 말려 베갯속으로 쓰면 두통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모살뜸(모래찜질)을 하실 때 숨부기낭 가지를 꺾어다 머리받침으로 쓰시던 기억이 난다. 줄기는 골체(삼태기)를 만드는 데 쓰인다.

해수욕장 동쪽에는 하얀 모래와 대비되는 까만 갯바위가 펼쳐져 또다른 정취를 자아낸다.
이곳은화산폭발로 흘러내린 용암이 편평하게 바다로 흘러든 모양을 보여주고 있다. 파호이호이 용암이다. 이날 해설을 맡은 제주참여환경연대 홍영철 대표는 '파호이호이'가 하와이 말로 '잔인하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용암의 점성이 낮아 빠르게 흘러내리며 주변을 덮어버리는 모습이 보는 이들에게는 잔인해보였을 것이다. 이와 달리 점성이 높은 아아 용암은 잘 흐르지 않아 표면이 거칠고 날카로운 형태로 굳는다. 날카로운 용암석을 맨발로 밟았을 때 아프다는 의성어 "아~"를 딴 것이라고 홍 대표는 덧붙였다.

이웃 구좌읍 월정리 해변은 역시 맑고 파란 바다와 하얀 모래가 눈부신 경관을 만들어낸다. 아름다운 해변 풍경은 아담하고 고즈넉한 마을과 어울려 도시의 번잡한 삶에 찌들린 이들에게는 힐링 장소로 적격이다. 제주도민들에게도 그리 주목받지 못하던 이곳에 '아일랜드 조르바'라는 낯선 이름의 커피집이 들어선 뒤 외부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다가 '고래가 될 카페'로 이름이 바뀌면서 월정 해변이 유명세를 타게 됐다. 급기야 최근 2~3년 사이 월정해변에 방문객들이 급증하기에 이르렀다.

관광객들이 타고온 승용차로 교통혼잡이 생길 지경에다 카페, 펜션, 게스트하우스 등이 줄줄이 들어서면서 땅값도 천정부지로 치솟아 바닷가 도로변 땅은 평당 1천만원을 호가하고 있다. 지금도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건물들이 지어지고 있다. 얼마 남지 않은 모래언덕은 건물을 짓기 위해 파헤쳐지고 있다. 결국 제주의 모래언덕은 이렇게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것도 아름다운 해변일수록 더욱 빠르게.

사라져가는 모래언덕을 뒤로 하고 봄꽃을 만나기 위해 구좌읍 송당리 체오름을 찾았다. 말굽형 분화구로 이루어진 오름의 형상이 골체(삼태기)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풍수지리를 주제로 한 제29회 제주탐방 때 왔던 체오름은 여전히 남다른 기운을 내뿜고 있다.

바람 한 점 없이 화창한 날씨에 초봄의 볕은 따스하다. 
온 천지가 겨울잠에서 깨어나 약동하는 소리로 가득하다.
파릇파릇 돋아나는 싹들은 아직 회색인 오름들을 연록빛으로 물들여갈 채비를 한다.  
 

3천년 전 제주섬에서 일어났던 환경적인 변화 이후 바람의 선물로 만들어진 바닷가 모래언덕.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머지않아 제주에서는 모조리 사라지고 말 모래언덕에서 장 자크 루소를 떠올린다.
그가 <에밀>에서 '쓸모'만을 생각하는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다.

"시간을 낭비하라!"

 

<프로필>
제주포럼C 공동대표
전 한겨레신문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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