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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가 대수인가? 우리 애들에게 쉴 틈을 주세요
공부가 대수인가? 우리 애들에게 쉴 틈을 주세요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5.06.18 14: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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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훈의 동화속 아이들 <6> 김현희의 「공부만 해서 문제야」
 

‘공부, 공부, 공부’

그 이름만 들어도 스트레스가 몰려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 공부가 취미라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대부분은 ‘공부’라는 두 글자에 잔뜩 스트레스를 받죠.

그런데 한자어인 ‘공부(工夫)’가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한자를 토대로 해서 글을 쓰고 있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과 일본에서는 공부를 뭐라고 부르는지 살펴봤어요. 우리나라 국어사전을 뒤져보니 ‘공부’는 ‘학문을 배움’이라는 뜻이 담겨 있네요. 중국에서는 공부를 ‘수에시(學習)’라고 표현을 하더군요. 일본에서는 ‘벤쿄(勉强)’라고 하고요.

‘공부(工夫)’라는 건 불교용어에도 있더군요. 불교용어로는 국어사전에 쓰는 뜻보다도 많았어요. 배운다는 뜻 외에도 노력한다는 게 포함돼 있어요. 그것만이 아니더군요. 불교용어에서의 ‘공부’는 여가를 가지거나 짬을 낸다는 내용도 들어가 있어요.

이쯤에서 이웃한 세 나라에서 말하는 ‘공부’의 의미를 제 식으로 풀어볼래요. 우리가 말하는 ‘공부(工夫)’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일본에서는 공사장의 인부를 낮춰서 ‘공부(工夫)’라고도 부르지만, 어쨌건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공부엔 사람이 들어가 있어요. 사람 중심의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이겠죠.

중국은 ‘학습’이니 말 그대로 배운다는 의미에 중점을 뒀죠. 일본어를 배울 때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 글을 쓰면서 ‘벤쿄(勉强)’를 들여다보니 참 요상합니다. 면(勉)은 힘쓰다는 뜻이고, 강(强)은 강하다는 뜻도 있지만 억지로 하게 하다는 뜻도 있어요. ‘면강(勉强)’은 우리 국어사전에는 없지만 한자자전에는 나와 있어요. 한자자전에서 쓰는 ‘면강(勉强)’은 억지로 시킨다는 뜻입니다. 일본은 공부를 억지로 시키는가 봐요.

김현희의 창작동화인 <공부만 해서 문제야>도 공부 때문에 벌어진 일을 담고 있습니다. 동화 속의 주인공인 영재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하위권을 맴돕니다. 집에서는 공부를 하라고 늘 닦달이고요. 그러다 영재는 ‘아롱다롱마을’로 가는 버스를 타게 됩니다. 아롱다롱마을은 어린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곳으로, 단 한가지의 소원을 들어줘요. 만년 꼴찌인 영재에게도 기회가 온 것이죠. 영재는 뭘 소원으로 얘기했을까요? 그렇죠. 다름 아닌 ‘공부를 최고로 잘 하는’ 것을 소원으로 내겁니다. 영재는 소원을 들어주는 사람으로부터 총명탕을 받아듭니다.

총명탕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뭔가 달라질 것 같네요. 곧 영재의 소원이 이뤄지겠죠 그런데 총명탕은 부작용이 있더군요. 밥을 먹은 뒤 천천히 총명탕을 흡수해야 하는데 영재는 밥도 먹기 전에 총명탕을 마셨던 거예요. 그래도 효능은 뛰어났어요. 공부를 멀리하던 영재는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책을 끼고 사는 건 물론, 다른 학생의 과제도 척척 풀어줍니다. 모두들 놀랐죠. 영재의 엄마와 아빠는 드디어 영재가 이름 그대로 영재가 됐다며 신나합니다. 그러나 그게 오래 가지는 않습니다. 너무 똑똑해진 영재는 자기주장만 펼칩니다. 수업시간에도 선생님 말씀에 끼어들어 자기가 아는 걸 다 말하는 건 물론, 시도 때도 없이 질문을 해댑니다. 선생님에게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아이들에게도 잘난 체를 합니다. 친구들도 멀어져갑니다. 그걸로 끝나면 좋으련만 총명탕의 부작용이 현실화됩니다. 몸은 늙어가고 입에서 침이 질질 흐릅니다. 이제는 영재의 엄마·아빠도 공부를 적당히 하라고 영재를 닦달할 정도가 됐어요.

주인공 영재가 총명탕을 지어준 이를 다시 만나 예전으로 되돌려달라고 하는 장면.

아롱다롱마을은 어린이에게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고, 그 소원을 취소하는 것도 딱 한번만 받아줍니다. 아롱다롱마을이 생각난 영재를 그 마을을 찾습니다. 총명탕을 만들어 준 이에게 침을 흘리지 않게 해달라고 하네요. 그러자 그 사람은 취소를 하는 방법뿐이래요. 영재는 고민에 빠집니다. 공부를 못 하는 영재가 좋을까, 공부는 잘 하지만 늙어가는 영재가 좋을까. 결국 영재가 선택한 건 예전의 영재입니다.

공부에 찌들어 살아야 하는 요즘 애들이 불쌍합니다. 공부의 원래 뜻인 ‘학습(學習)’보다는 억지로 공부를 시키게 만드는 ‘면강(勉强)’이 우리 사회를 휘감고 있어서 그렇겠죠. 주변에는 죄다 1등만 있어요. 90점 아니면, 100점은 맞아야 살아가는 사회 같아요. ‘수·우·미·양·가’에서 ‘가’가 수두룩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젠 그런 이들은 취급을 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회가 되는 게 너무 아쉽네요. 우리 애들이 공부가 아닌 자기가 할 수 있는 걸 즐겁게 하면서 사는 사회는 요원한가요? 불교용어의 ‘공부(工夫)’처럼 공부는 노력하고, 짬도 내고 그런 즐거운 공부가 됐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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