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6 17:57 (화)
낯선, 지극히 낯선
낯선, 지극히 낯선
  • 미디어제주
  • 승인 2015.07.12 14: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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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91>

처음 선택한 길은 바꾸지 않는다. 그 길이 멀더라도 불편하더라도 그냥 간다. 매일의 출근길은 첫 출근할 때 선택한 길 그대로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문을 열어 신문을 꺼내고, 신문을 보며 면도를 한다. 집에 들어오면 양말을 벗고 발부터 씻는다. 꼭 그래야만 한다. 변화가 반갑지 않고, 변칙도 달갑지 않다. 습관이 고착되어 원칙이 된 것이 꽤나 많다.

어빙 고프만(Erving Goffman)의 프레임 이론(frame theory)이 있다. 우리는 맥락(context)에 갇혀있다는 것이다.

가령 야당이 진보라 정의되는 순간 여당은 정책의 색깔에 관계없이 보수로 정의되며 틀에 갇힌다. 실질적으로 대부분의 선진국은 급진적 좌파,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등을 포기하여 정치가 중도로 수렴함에도 말이다. 심지어 미국의 정치도 위험적인 극단을 피하여 매파든 비둘기파든 실질적으로 양당 모두 중도를 지향하고 있다.

프레임 이론의 극명한 예는 이렇다.

죽을병에 걸린 환자가 두 개의 병원을 방문한다. 그러자 두 명의 의사는 수술을 권유하기 위해 환자를 아래 두 가지 다른 방법으로 설득한다.

‘수술시 사망률은 20%입니다.’

‘수술의 성공률은 80%입니다.’

환자는 어느 대답에 수술을 결심할까? 아마 두 번째가 아닐까 싶다. 틀이 한번, 그리고 먼저 정해지면(성공률 80%), 나머지 이면(사망률 20%)에 대해 사람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이렇듯 프레임 이론은 언어학에서 태동했지만 사회학, 심리학을 거쳐 경제 및 경영학, 특히나 마케팅 분야에서 활발히 도입되었다. 가령 19,800원의 티셔츠에 대해 사람들은 싸다는 느낌을 대부분 받자마자, 다른 15,000원의 훌륭한 티셔츠와 비교하지 않고 구매한다.

프레임을 깨기보다는 새로운 틀을 더욱 만들어가는 것이 보통이다.

낯선 길로 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낯선, 지극히 낯선 생각을 갖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상은 모자이크처럼 딱딱 들어맞는다.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큰 문제가 없으면 밋밋하게나마 돌아간다.

이른 새벽. 동네 어귀에서 술주정뱅이 할아버지들의 다툼이 벌어진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 진정한 술꾼들의 장점은 무적체력에 있다. 젊은이들도 해내기 힘든 1박 2일 마라톤 음주가무를 그들은 해낸다.

고요한 새벽. 다툼은 이어진다. 뭐가 그리 할 말이 많고 부딪히는 것이 많은지 싸우는 소리는 높아져만 간다.

잠결에 생각한다. 누가 경찰서에 신고 안하나?

이때, 낯선, 지극히 낯선 생각이 떠올랐다.

정이 있구나. 술주정뱅이들의 다툼에도 주변 300여 가구의 사람들이 모두 한 가지 생각을 하고 있구나.

‘저 할아버지들 잊을 만하니 또 새벽에 술 먹고 싸우시네.’

서울 같으면 벌써 삐뽀삐뽀 소리와 함께 경찰서에 끌려갔을 할아버지들일테다. 하지만 새벽에 잠을 설치는 주민들은 모두 두 할아버지를 알고 있다. 기껏해야 몇 달에 한 번 새벽에 깽판을 칠뿐이다.

주변 300여 가구의 직장인 500여명과 아이들 1,000여명은 아마 그날 졸려서 일하기나 수업을 받기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의사결정인 만장일치로 새벽의 다툼을 ‘용서’해 주었다.

아침. 선잠을 자서 그런지 온 몸이 어색하다. 낯선 경험을 하고, 지극히 낯선 생각을 하고, 극도의 낯선 환경에 사는 느낌이다.

내가 가지고 있던 틀들이 하나둘 허물어지는 것을 느낀다.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몸도 마음도 바뀐다는 것을 배운다.

낯선, 지극히 낯선.

오늘은 낯선 장르의 책을 밤을 새워 읽어봐야겠다.

다음 주는 낯선 길로 출근을 해 봐야겠다.

다음 해에는 지극히 낯선 나를 만나야겠다.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현 현대문예 제주작가회 사무국장
저서 : 『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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