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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기, 그리고 서서히 스스로 잊혀져가기
침묵하기, 그리고 서서히 스스로 잊혀져가기
  • 홍석준 기자
  • 승인 2015.08.02 14: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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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窓] 제주해군기지 투쟁 3000일, 강정생명평화대행진을 보는 시선들
2015 강정생명평화대행진 마지막날, 행진 참가자들이 해군기지 공사장 앞에서 인간 띠잇기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는 모습.

지난 일주일 내내 제주 지역은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7월 29일 관측된 낮 최고기온 36.7도는 올들어 가장 높은 기온이었다. 제주지방기상청은 1923년 기상 관측 이래 역대 다섯 번째로 높은 기록이라고도 했다.

이 글을 쓰는 기자는 그 일주일의 단 몇 시간도 그들과 함께 하지 못했다. 2015 강정생명평화대행진이 진행되는 내내 가슴이 큰 바윗덩어리에 짓눌리는 듯한 죄책감에 시달렸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필자를 힘들게 한 것은 주위의 많은 무관심한 시선들이었다. 심지어 주위의 많은 지인들 중에서도 ‘올해 말이면 공사가 다 끝난다는데…’ 하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침묵했었습니다’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젊은 시절 나치 독일의 유태인 학살 등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다가 감옥에 갇혀 있던 중 전쟁이 끝날 무렵 구사일생으로 연합군에 구출된 에밀 구스타프 프리드리히 마틴 니묄러 목사가 70살의 나이에 자신의 삶을 참회하면서 쓴 시다.

독일에 처음 나치가 등장했을 때

처음에 그들은 유태인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했습니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했습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그들은 사회주의자들을 잡아갔습니다.
그 때도 나는 침묵했습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엔 노동운동가들을 잡아갔습니다.
나는 이 때도 역시 침묵했습니다.
나는 노동운동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가톨릭 교도들과 기독교인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했습니다.
나는 가톨릭이나 기독교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ㄹ기고 어느 날부터 내 이웃들이 잡혀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했습니다.
나는 그들이 뭔가 죄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은 내 친구들이 잡혀갔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나는 침묵했습니다.
나는 내 가족들이 더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습니다.
하지만 이미 내 주위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2015 강정생명평화대행진 마지막날, 행진 참가자들이 해군기지 공사장 앞에서 인간 띠잇기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는 모습.

<전쟁책임 고백서>라는 책을 쓴 니묄러 목사는 이 책에서 “전쟁의 책임은 히틀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목사인 나에게도 있다”고 고백했다.

처음부터 히틀러의 나치 정권의 폭압에 아무런 항의 말도 하지 않았던 자신도 이후 자행된 나치 독일의 유태인 학살과 전쟁 등에 책임이 있다고 반성한 것이었다.

이번 강정생명평화대행진에 함께 한 세월호 유가족들과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 용산 유가족과 밀양 송전탑 지역 주민들, 그리고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 사이판, 대만 등에서 참여한 이들이 모두 우리 이웃의 고통에 손을 내밀어준 이들이었다.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것이 얼마나 절실한지 알기 때문일 것이다.

나와 무관하다고 해서, 내와 내 가족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으로 정작 나의 관심과 손길이 필요한 곳을 지나치다 보면 언젠가 그 침묵과 무관심이 나를 향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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