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업을 하면 고개가 끄덕여져야 한다. 그걸 한자어로 말하면 ‘수긍’이 되겠다. 그런데 우린 수긍하지 못할 일을 숱하게 만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에 과연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지”라고 말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
지역을 좁혀보자. 굳이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제주도만을 놓고도 마찬가지이다. 수긍하지 못할 일이 주변에 널렸다.
오늘(4일) 아침 보도한 ‘산지로 붉은색 길’도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직접 가보면 붉은색이 모든 걸 압도하는 현장을 읽을 수 있다. 붉은색은 다른 곳에 시선을 두지 못하도록 하는 힘이 있다. 그러다보니 공덕동산으로 오르는 길의 계단도 눈에 띄질 않는다. 산지로 바닥에 덧칠한 붉은색은 그만큼 강렬하다.
기사를 썼더니 이곳저곳에서 연락이 온다. 붉은색을 칠했다는 당사자와 자신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서 전혀 연관이 없다고 하는 이들이다.
먼저 전화를 준 곳은 아라리오뮤지엄이다. 산지로 붉은색이 시작되는 길에 있는 곳이어서 일반인들의 오해를 받기 딱이다.
아라리오뮤지엄 관계자는 “우리도 민원을 제기했다. 제주도에서 하는 사업이라길래 불편해도 참기로 했다”고 한다.
시간이 좀 지난 뒤 건입동 동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사실을 말했다. 앞서 오전에 보도한 기사와 관련, 해당 공무원은 잘 몰라서 그랬단다. 도로를 빨간색으로 덧칠한 당사자가 건입동이라는 말이었다.
건입동장은 그러면서 빨간색으로 덧칠한 이유를 덧붙였다. ‘공덕스토리텔링 거리조성사업’이 빨간색 등장의 이유였다는 게다. 이 사업은 지난 6월 22일 문화재현상변경 심의를 끝내고 곧장 시작됐다. 공덕비와 김만덕기념관을 연결시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관광객을 끌어들인다는 구상이다.
붉은색을 칠한 당사자는 밝혀졌다. 왜 하는지도 밝혀졌다. 그런데 궁금한 건 풀리지 않는다. 왜 붉은색이어야 하나.
건입동장은 “건입동 발전을 위해 주민참여 예산으로 사업을 한다. 특혜나 그런 게 있는 건 아니다. 아라리오뮤지엄과는 관계가 없고, 우리가 이걸 먼저 한 것이다”면서 “붉은색은 나쁜 게 아니다. 자주 쓰이고 때도 타지 않는다”면서 붉은색의 장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건입동장의 답은 여전히 뭔가 부족하다. 솔직히 말하면 스토리텔링은 기존의 이야기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장치의 하나로 말할 수 있다. 때문에 스토리텔링은 역사적 사실을 돋보이게 해야 한다. 그렇게 돼야 진정한 스토리텔링이 될 수 있다. 건입동이 추진한다는 스토리텔링은 과연 그런가. 붉은색 때문에 스토리텔링에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인 공덕비도 함몰됐다. 공덕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건입동 공덕동산에 위치한 공덕비는 조선말 인물인 고서흥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다. 그는 지역 주민들의 민원을 해소하기 위해 조 300석을 내놓아 도로를 개설해 주민들의 숙원을 해소했다고 한다.
건입동이 정말 ‘공덕스토리텔링’을 하려 한다면 공덕비를 강조해줘야 한다. 그런데 붉은색에 파묻히게 만드는 그런 사업이 과연 스토리텔링으로 가치를 확보할 수 있을까. 이 곳에서 평생을 산 이들이 붉은색에 지쳐있는데, 매일 같이 오가는 길을 온통 붉은색으로 치장하면 누가 박수를 보낼까.
건입동은 공덕비와 붉은색이 어울리기나 한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또한 문화재현상변경 심의를 하면서 붉은색에 왜 사인을 해줬는지도 궁금하다.
<김형훈 기자 / 저작권자 ⓒ 미디어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