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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물 관덕정, 시내 가로지르는 중심 동맥…일제때 ‘원정통’
상징물 관덕정, 시내 가로지르는 중심 동맥…일제때 ‘원정통’
  • 하주홍 기자
  • 승인 2015.08.21 10:1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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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옛길을 걷다]<4> 관덕로(觀德路)(1)
원도심 옛길 가운데 가장 늦은 일제 강점기에 생겨…1970년대까지 ‘관가·금융.상가 중심’

제주시 ‘원도심’은 ‘제주성’을 바탕으로 한 제주지역 지리·역사적 근원지이자 중심이다. 이곳은 제주 과거와 현실이 함께 포개진 역사문화공간이다. 삶의 궤적을 담고 있는 도시공간이며 생활공간이다. 원도심의 동맥은 ‘옛길’을 중심으로 이어져 있다. <미디어제주>는 제주시 ‘원도심’을 중심으로 한 ‘옛길’을 취재, 역사·지리·건물·상권·문화·인물 등 삶과 기억의 궤적을 살펴보려한다. 이를 통해 제주 원도심 위상과 정체성을 드러내고 재생과 미래설계를 찾아보려 한다. <편집자주>

관덕로 지도(2015년).

#제주 원도심 옛길 가운데 가장 늦은 일제 강점기에 생긴 길

관덕로(觀德路)는 관덕정(觀德亭)에서 동쪽으로 중앙로터리를 거쳐 동문교(東門橋·지금은 복개돼 없어져버림)까지 이어지는 동서로 난 길이다.

이 길은 제주성안 길 가운데 가장 늦게, 일제 강점기에 제주시지역에 새로 만든 길 3곳 (관덕로·북신작로·산지로)가운데 하나이다.

일제는 당시 관덕정 앞에서 생직골(옛 한일은행 앞, 배부른 동산~동문다리)을 거쳐 동문다리까지 길을 새롭게 만들며 원정통(元町通)이라 이름을 붙였다.

원래 관덕정 부근에 서문한질에서 동서로 뻗은 생짓골(향교길)사이엔 따로 길 이름이 없었고 넓은 공터인 광장이 있었기 때문에 관덕로는 일제 이전 까진 없던 길이었다.

생짓골을 중심으로 북쪽엔 알생짓골(옛날 향교가 있었던 관덕로 북쪽, 지금은 중앙로가 탑동까지 관통함으로써 길이 거의 흔적이 없다. 옛 아세아극장에서 현재 천년타워까지 난 샛길)과 알막은골(관덕로 중간 옛 북경반점 입구 북쪽 칠성로 쪽이 난 길)이 있었다.

생짓골 남쪽엔 웃생짓골(향교로 가는 윗동네길. 원래 남북으로 난 길과 동서로 연결된 도로)과 웃막은골(남쪽으로 동문시장 안 산지천 입구까지)이 연결돼 있을 뿐이었다.

제주지역에서 근대적 상가가 생겨나기 시작한 일제강점기엔 당시 이곳을 모토마치(元町)라 불렀다. 북쪽에 있는 혼마찌(本町·지금의 칠성로)와 함께 제주상권의 중심지였다.

이 지역은 제주인에겐 관덕로 보다는 오히려 원정로(元町路) 또는 원정통(元町通)으로 잘 알려져 있다.

길 이름이 원정로에서 관덕로로 바뀐 건 1968년8월15일부터 제주시가 시내 주요가로 이름을 대폭 제정·정리하면서부터이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원동당구장’ ‘원동오비홀’ ‘원다방’ 등 일제 때부터 내려왔던 원정(元町)의 ‘원’자를 따서 지은 상호가 많았다.

관덕정 앞 광장에서 오일장이 열린 모습(1914년).

# 제주역사 심장부·시민광장, 관덕로 상징은 ‘관덕정’

관덕로의 상징물인 관덕정은 유적이란 가치와 더불어 앞 광장은 유사이래 명실공히 제주역사의 심장부이자 중심지였다.

관덕정은 1448년(세종30년)에 안무사 신숙청(辛淑晴)목사가 창건했다.

창건기엔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보는 것이다(射者所以觀盛德也)”란 「예기(禮記)」의 문구를 따 ‘관덕’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름 그대로 이곳에선 활쏘기 시합, 과거시험, 진상용 말 점검 등 각종행사가 이뤄졌던 민과 관이 만나는 광장으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일제는 자동차를 원활하게 다닐 수 있게 하기 위해 관덕정을 지나는 길을 넓히며 새로운 길 원정로를 만들었다.

행정업무를 위한다는 구실로 제주 목관아 건축물을 철거해 근대건축물을 짓기 시작하면서 이전까지 제주인의 중요한 생활공간이었던 관덕정 앞 광장을 빼앗는 결과를 가져왔다.

광장 뿐 만아니라 물매가 유연하게 뻗은 운치 있던 관덕정 지붕 원형을 잃게 만들었다.

당초 관덕정 건축의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15척 정도로 긴 관덕정 처마를 2척이나 줄여 일본식 지붕으로 고쳐버렸다.

게다가 주위사면이 훤히 트인 공간에 흰 페인트를 칠한 문을 만들어 다는 등 고유미를 잃어버리게 했다.

지금은 새롭게 목관아가 들어서면서 최근 100년 사이 건축물이 모두 없어져 버렸지만 관덕정을 중심으로 주요기관들이 거의 집중돼 있었다.

관덕정은 제주도 제5대 도백이었던 김충희(金忠熙)지사 때 제주도청 본관으로 쓰기도 했다.

관덕로 옛 모습(1970년대)

# 관덕로는 왜 관공서·금융·상권 중심이 됐을까

조선시대부터 제주목 관아지가 관덕정 옆에 있어서 본도 관가 중심 몫을 해왔다.

현재 목관아지 서쪽 끝 자리엔 제주지방법원·검찰청 등이 들어섰다가 제주개발건설사무소, 국도유지관리사무소 등이 들어섰다가 없어졌다.

지금 목관아지 정문으로 들어서면 일제 때 전라남도제주도청(全羅南道濟州島廳), 광복 뒤 미군정청(美軍政廳)에 이어 제주도경찰국과 제주경찰서 등이 자리했다.

현재 제주우체국자리는 1903년 제주우편수취소로 시작해 1907년 제주우편국(濟州郵便局), 1990년 제주체신청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특히 관덕정 앞 광장은 인근 제주북초등학교 운동장과 함께 각종 군중집회와 행사장소, 굵직한 역사적인 사건 등이 일어났던 곳이다.

1901년 일어났던 ‘이재수(李在守)의 난’ 또는 ‘신축교란(辛丑敎亂)’, ‘제주4.3’의 원인이 된 3.1절 발포 사건 등 굵직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이곳에선 대통령·국회의원선거 등 각종 정치유세, 지사·시장 취임식, 국경일 행사 등이서 이뤄졌다.

과거 현대식 영화상영관이 없었던 때엔 여름철 저녁 어둑어둑해질 때면 관덕정 앞에 대형 스크린을 가설해 영화를 상영, 광장에 시민들이 가득 모여들어 감상하기도 했다.

관덕정 앞은 제주도민들이 모여서 소통하는 중요한 ‘광장’(廣場) 몫을 해오다, 제주목관아 복원이란 이유로 모든 건물과 광장이 없어지면서 100년 역사 흔적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이곳은 지난 1979년 연동(蓮洞)지역에 신시가지가 생겨 관공서가 대단위로 옮겨가기 전까진 ‘제주 관가(官街)1번지’ 또는 ‘제주 관청가(官廳街) 1번지’로 이름이 나 있었다.

당시까지 제주시에 있었던 공공기관 40군데 가운데 22군데가 집중적으로 자리해 있었기 때문이다.

관덕정 앞 광장은 제주시 최초 오일장터였다. 이곳은 조선시대 말 이원구 목사 때 처음 장이 섰다.

2와 7이 들어가는 날에 정기적으로 장이 서는 제주시오일장은 그 때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여태껏 계속 이어오고 있다.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상설시장이 없었던 때라 관덕정에서 우편국 앞까지 상판이 진열되는 등 성시를 이뤘다.

제주도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장이어서 다양한 상품이 나와 거래가 활발하게 진행됐다.

“관덕정 설렁국(설렁탕)도 먹어난 놈이 먹는다”란 속담이 이 시기에 나왔다고 할 정도로 도내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 성황을 이루는 등 진풍경을 보였다.

이곳은 오일장이 서면서 도내 각지에서 사람들이 왕래가 잦게 됨으로써 버스 정기노선 터미널이 처음 생겨난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인다.

관덕로 (2015년 하늘에서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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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시절 2015-08-21 10:35:04
관덕정 바로 앞에 있던 분수대(1960년대 중반으로 기억)에서 사진을 찍던 사람들의 모습들이 되살아나네요 ㅎㅎ
좋은 관덕정의 추억과 역사를 알려준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