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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때 제주말은 군사적·경제적으로 중요한 진상품
조선 때 제주말은 군사적·경제적으로 중요한 진상품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5.09.27 05:27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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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순력도 다시보기] <5> 말을 조정에 올려 보낼 때 모습을 그린 ‘공마봉진’
관덕정 앞에서 진상할 말을 점검하는 모습.

“군사 행정은 말에 관한 일보다 시급한 것이 없습니다. 제주도는 말에 모두 호수(號數)가 있는데, 목자들이 각기 호수대로 분양하다가 생산된 것과 죽은 것을 하나하나 와서 알리므로 숫자의 증감을 언제나 환하게 알 수 있습니다. 절제사가 봄·가을로 순찰하면서 하나하나 점찍듯이 숫자를 조사하면서 잉태한 것도 아울러 기록합니다.”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에 담긴 내용이다. 그러니까 중종 20년(1525) 가을철, 제주목사 김흠조가 상소한 내용이다. 제주도는 말의 숫자를 일일이 기록을 하는데 별감이 내려와서 왜 또 말을 모아서 일일이 조사를 하느냐는 불만이 섞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걸로만 보면 제주도는 말에 관한한 아주 자세하게, 그것도 어느 말이 임신을 하고, 혹은 몇 마리가 죽은 사실까지 자세하게 파악을 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왜 그랬을까. 말은 제주도에서 육지부로 올려보내는 진상품 가운데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에서 나는 말은 매년 조정에 공물로 바쳐졌다. 육지부로 보내는 말은 임금이 타는 ‘어승마’, 전투에 쓰이는 말, 짐을 실을 때 사용하는 말 등 쓰임이 다양했다.

그러면 제주에서 나는 말은 어떤 명목으로 육지로 보내졌을까. 매년 연례적으로 보내는 ‘세공마’가 있으며, 3명일 진상마가 있다. ‘3명일’은 임금 탄신일과 정월 초하루, 동지 등을 일컫는다. 또한 3년마다 보내는 ‘식년공마’ 등이 있다. 3년마다 올려 보내는 식년공마는 임금이 타는 ‘어승마’와 특별한 용도에 쓰이는 ‘차비마’ 등이 포함된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말을 기르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지리적으로 제주도의 말이 중요한 건 물론, 제주도 이외의 지역에서 생산되는 말의 가치도 마찬가지였다. 각지에서 말은 매우 소중하게 다뤄졌음은 물론이다. 그러지 못할 경우 문책을 당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조선왕조실록엔 말을 잘 기르지 못해 문책을 당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그나저나 제주도는 말의 고장으로 말과 관련해서는 더욱 엄격했다. 앞서 조선왕조실록 기록에서처럼 별감으로 하여금 말을 일일이 조사하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을 보면, 말에 대해서는 목사의 관심 역시 높았음을 알 수 있다.

<탐라순력도>에도 말과 관련된 그림이 많다. 말과 직접 관련이 있는 그림은 ‘공마봉진(貢馬封進)’과 ‘산장구마(山場驅馬)’라는 그림이다. 이 가운데 ‘공마봉진’은 말을 조정으로 올려 보낼 때의 그림이다.

이 그림엔 임금이 탈 어승마 20마리, 매년 정기적으로 보내는 말 8마리, 차비마 80마리, 임금의 생일 축하에 쓰일 ‘탄일마’ 20마리, 동짓날에 중국으로 사신을 보내며 함께 보낼 ‘동지마’ 20마리, 정월 초하루에 바칠 ‘정조마’ 20마리, 각 목장에서 바치는 ‘세공마’ 200마리, 나쁜 일이 있을 때 쓰일 ‘흉구마’ 32마리, 짐 싣는데 쓸 ‘노태마’ 33마리 등이다. 이를 합하면 433마리가 된다.

‘공마봉진’엔 어승마와 차비마 등이 포함돼 있다. 어승마와 차비마는 식년, 그러니까 3년마다 보내기 때문에 이 그림은 식년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탐라순력도 중 '공마봉진'.

말을 보낼 때는 후다닥 골라서 보내는 건 아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말은 제주에서만 중요한 물품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매우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을 보낼 때도 매우 신중하게 다뤘다. ‘공마봉진’이 이뤄지는 장소는 관덕정 바로 앞이다. 그림에는 말 2마리를 한 사람씩 맡고 있다. 말을 몰고 있는 이들은 한 마리씩 목사 앞에 데리고 나가서 점검을 받는다. 점검이라고 하지만 최종 확인일 뿐이다. 사실 말의 나이와 크기, 건강 등의 상태는 말의 목록과 함께 사전에 보고된다. 목사는 이를 확인하는 단계로, ‘공마봉진’이 바로 그 그림이다. 이렇게 해서 점검을 통과한 말은 배에 실려 먼 길을 가게 된다.

그럼 ‘공마봉진’은 언제 시행됐을까. 이 그림엔 음력 6월 7일로 나와 있다. 지금으로 보면 7월이 된다. 그렇다면 이 때가 말을 직접 올려 보내는 시절일까. 이익태 목사가 쓴 <지영록>에도 ‘공마봉진’과 관련된 내용이 있다. <지영록>에 따르면 5월 27일에 말을 직접 확인하고 보냈다고 돼 있다. <탐라순력도>와 <지영록> 등을 참고하면 말을 육지부로 대거 올려보내는 시점은 양력으로 환산하면 6월이나 7월께가 된다는 걸 알 수 있다.

조선 당시 말은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무척 중요했다. 하지만 제주사람들에게 말을 진상하는 건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간혹 ‘공마를 중단하라’는 지시가 내려오기도 한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때의 기사를 보면 공마를 중단하거나 미루도록 하는 기사가 눈에 많이 띈다.

그래도 말을 조정에 진상하는 일은 계속된다. 공마는 대한제국 탄생 전까지 이어졌다.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마지막 ‘공마’는 1881년(고종 18년)이다. 이 때 107마리의 말이 호송된 것으로 기록이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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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yedong 2015-10-01 17:59:53
인조 7년(1629)부터 고종 30년(1892)까지 식년(式年)에 세공마(歲貢馬)를 진헌(進獻)하는 시기는 대다수기 7월 중에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주삼읍에서 중앙조정으로 마지막으로 공마(貢馬)한 시기는 고종 30년(1893) 8월 3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고종 30년(1893) 8월 3일에 또 사복시(司僕寺)의 일제조와 이제조의 뜻으로 아뢰기를 “제주에서 니온 후운(後運)은 세공마(歲貢馬) 200필(又以司僕寺 一二提調意啓曰 濟州出來後運歲貢馬二百匹)_”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웬지씁쓸함이 2015-09-29 22:08:45
육지가 목초지가 더 넓고, 많고 운송에도 용이하다.
제주는 배로 운반해야하는 어려움도 있는데 제주말을 그렇게 많이 진상받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