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9 15:12 (금)
나만의 레시피
나만의 레시피
  • 홍기확
  • 승인 2015.11.02 11: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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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102>

 먹방(먹는 걸 보여주는 방송)에 이어 쿡방(요리하는 걸 보여주는 방송)이 장기간 TV 프로그램의 대세다.
 15년간 TV를 보지 않는 내가 이런 트렌드를 아는 건 TV 대신 선택한 신문과 잡지에 의해서다. 최근 트렌드를 TV보다 빨리 알 수는 없지만, 사회적 흐름의 냉정한 분석은 종이로 된 매체들이 여전히 깊이가 있다.
 먹방과 쿡방은 내 수필의 화두인 식구(食口, 함께 밥 먹는 사람)와 가족(家族, 한 지붕 울타리에 모인 사람들)에 대한 현대인들의 그리움의 발로가 아닐까 한다.
 혼자 밥 먹을 때 먹방을 보거나, 혼자 밥 먹는 사람들끼리 맛집 동호회를 만들어 맛집 기행을 가며 서로의 외로움을 달랜다.
 남이 해준 밥을 그리워하며 쿡방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가상으로 해주는 음식에 슬픔을 달랜다. TV의 요리사가 TV 앞에 앉아있는 자신에게 요리를 해주고 얘기해주는 착각과 환상에 기쁨을 얻는다.

 언젠가 아내가 나에게 얘기한 적이 있다. 요리 하나하나마다 얽힌 사연을 수필로 써 보는게 어떻겠냐고. 소주, 순대국, 돼지갈비, 치킨. 근본적으로 나아가면 술상, 밥상, 그곳의 술 친구, 밥친구. 우주적으로 간다 치면 식구, 가족.
 똥은 하루에 한번 싸며 잠도 한 번 자는 판국에 식구는 하루 세 번씩이나 밥을 함께 먹는다. 그만큼 밥은 식구를 잇는 매개체이며 식사(食事), 즉 밥먹는 일은 식구의 품격을 높이는 고귀한 의식이다.

 하지만 요리로 글 쓰는 일은 이미 글렀다. 게으른 나보다 발 빠른 공지영 작가가 『딸에게 주는 레시피』란 책을 출간했다. 요리란 먹는 것에 불과한 내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면 레시피(요리법)까지 곁들인 수필을 쓰는 공지영 작가는 한참 진화한 크로마뇽인쯤 되겠다. 이 뿐만 아니다. 최근 요리에 대한 에세이는 레시피 책들만큼이나 범람한다.
 그러나 나만의 레시피가 없는 건 아니다. 요리를 ‘하다보면’ 그만의 비법, 테크닉이 창조된다. 마찬가지로 요리를 ‘먹다보면’ 요리를 만들어준 사람에 대한 경의와 친절함, 그 사람의 요리를 먹게 되기까지 내 삶에 대한 경외와 절절함이 느껴진다.

 오늘은 소주를 마셨다. 나만을 위한 레시피가 펼쳐진다.
 곧 죽어도 안주는 5개. 그 중 국물안주는 필수로 한 개 포함해야 한다.
 테이블 세터인 1번 타자는 아이가 남긴 라면 국물. 상위타선으로 연결시키는 2번 타자는 아침에 먹다 남은 고추참치 통조림. 중심타선인 3, 4, 5번 타자는 급조한 비빔면, 골뱅이 통조림, 장모님이 주신 울릉도 오징어. 나름 풍성한 식탁이다.
 나는 이런 소주 일병 및 안주 오호장군과 환상적으로 어울리며 일상의 피곤을 잠시 잊고 이렇게 레시피를 늘어놓는다.

 비빔면은 불어가고, 구운 오징어는 딱딱해진다. 고추참치는 기름만 남았고, 골뱅이도 몇 개만 남았다. 이들은 분명 내일 약간의 밥, 고추장과 함께 비빔밥으로 화려하게 환생하실 것이다. 여러모로 축복할 일이 천지다. 나는 내일 새벽을 밝힐 것이고, 비빔밥을 거룩하게 드실 것이며, 새로운 하루를 찬양할 것이다.
 
 누군가의 레시피는 다른 이의 이정표가 되고 그들만의 레시피를 재창조해낸다. 혼자 술 먹는 레시피. 뇌도 가끔씩은 혼자만의 여유가 필요하다. 멍 때리는 휴지기가 필요하다. 나는 혼자 술 먹는 시간에 생각을 하고, 수필을 구상하며, 과거를 반추하고 앞날을 계획한다.
 먹방과 쿡방을 보지 않는다. 혼자서 술을 마신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서귀포시청 공무원 밴드 『메아리』회장 (악기 : 드럼)
저서 : 『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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