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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공경엔 남녀 구별도, 신분·인종 차별도 없었다
노인 공경엔 남녀 구별도, 신분·인종 차별도 없었다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5.11.06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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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순력도 다시보기] <6> 조선시대 경로잔치인 ‘양로연’

노인 공경은 아주 오랜 산물이다. 역사적 사료는 노인 공경에 대한 많은 사실을 쏟아내고 있다. 노인 공경에 대해서는 우리나라만큼 유별난 나라가 있을까 싶다. 특히 성리학 사고가 깊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조선시대는 숱한 역사 기록으로 노인 공경을 말하고 있다.

“100세 된 노인은 세상에 드물다. 해마다 쌀 10석을 지급하고, 매월 술과 고기를 보내 줘라. 월말엔 그 수효를 기록해 보고하라.”(세종실록 67권, 세종 17년 1월)

세종 17년이면 1435년이다. 세종 나이 39세로, 100세 노인을 잘 돌보라면서 내린 명령이다. 그렇다면 100세 이상 노인만 공경의 대상이었을까. 그건 아니었다. 조선은 70세 이상이면 응당 대접을 받는 구조였다. 조선시대엔 노인과 관련해 ‘시정(侍丁)’이라는 게 있다. ‘정(丁)’이라는 글자로 판단을 한다면 어떤 부역을 하는 일임을 짐작하게 한다. 거기에 ‘모신다’는 뜻의 시(侍)라는 한자가 들어갔으니 해석은 쉽게 될 듯하다. ‘시정’을 우리말로 풀이한다면 ‘모시는 일을 하는 장정’ 쯤으로 해석이 가능해진다. 즉 ‘시정’은 노인을 모시는 일로 군역을 면제해준다는 뜻이 된다.

만일 70세 이상 노인을 모실 사람이 없으면 어땠을까. 그 때는 손자 가운데 한 사람을 골라 시정을 주도록 했다. 친손자가 없으면 외손자에게 시정을 주고, 외손자도 없게 되면 조카에게 시정이 돌아갔다.

80세 이상이면 어땠을까. 벼슬을 하더라도 돌아가서 부모를 모셔야 했다. 90세 이상인 경우엔 아들이 여럿 있게 되면 모두 ‘시정’을 받게 된다. 옛 사람들의 수명을 감안하면 그런 혜택을 받는 이들은 많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런 규정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의미를 지닌다.

조선은 자식들로 하여금 노인을 모시도록 강제를 한 것과 더불어 국가 차원에서 노인을 봉양하는 행사를 직접 주재하기도 했다. 노인들을 모시고 여는 잔치라는 뜻에서 ‘양로연(養老宴)’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양로연’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조선왕조실록을 들여다보면 그 시점을 유추할 수 있다. 세종 2년(1420) 조선정부는 각 지역에서 올라온 건의 사항 등을 의논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이 때 창평현령이던 송복이 올린 글이 있다. 송복은 노인의 중요성을 설명한 뒤 서울과 지방에서 매년 봄·가을에 70세 이상의 노인을 모시고 잔치를 열 것을 건의했고, 조정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옛날 법제를 참고해서 시행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탐라순력도>는 3개의 ‘양로연’ 관련 그림이 있다. 각각 제주목과 정의현·대정현에서 진행된 노인 잔치였다.

<탐라순력도> 중 '제주양로'.

양로연은 남녀 구분을 두지 않았다. 거동이 불편한 이들은 노비를 시켜 부축해서 양로연에 참석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신분을 따진 것도 아니었다. 승정원이 천민을 양로연에서 배제를 해야 한다고 하자 세종은 그래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세종은 “양로(養老)하는 까닭은 그 늙은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고, 그 높고 낮음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다”면서 천민이라도 노인이라면 양로연의 대상임을 강조했다.

세종 때는 4군6진을 개척하면서 영토를 넓혔다. 따라서 자연스레 여진족들도 조선의 영토에 포함됐다. 오랑캐라고 하더라도 80세 이상의 노인을 불러들이고 압록강 너머의 오랑캐들도 양로연에 얼굴을 비치면 막지 말라고 지시를 내릴 정도였다.

이를 정리해보면 조선시대 양로의 대상은 대게 80세 이상의 노인들이었고, 남녀의 구분은 물론 천민도 포함됐다. 여기에다 오랑캐라고 하더라도 노인들이라면 막지 않고 참석시키도록 했다. 그러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뇌물을 받아 죄명이 몸에 찍히는 형벌을 받은 이들은 참여할 수 없도록 했다.

앞서 <탐라순력도>엔 모두 3개의 양로연 그림이 있다고 했다. ‘제주양로’, ‘정의양로’, ‘대정양로’ 등이다. <탐라순력도>에 보이는 양로연은 정의현을 시작으로, 대정현, 제주목 순서로 진행하고 있다. 이는 이형상 목사가 화북을 시작으로 동쪽으로 제주도를 한바퀴 돌면서 순력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의현 양로연은 1702년(숙종 28) 11월 3일 진행됐다. 90세 이상이 5명이었고, 80세 이상은 17명이었다. 대정현 양로연은 11월 11일에 열렸다. 90세 이상은 1명이었고, 80세 이상은 11명이었다.

제주목에서 진행된 양로연은 정의현과 대정현에 비해 무척 크게 열렸다. 이 자리엔 전·현직 현감들이 자리를 하고 있다. ‘제주양로’ 그림엔 100세 이상 3인, 90세 이상 23인, 80세 이상은 183인으로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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