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8 17:21 (목)
성적표 받은 날
성적표 받은 날
  • 홍기확
  • 승인 2016.01.05 10: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109>

 방송통신대학교의 성적통지서를 받았다.
 베트남어과를 졸업하고, 의외의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세 번째로 뜬금없는 경영학과를 다니고 있다.
 성적표가 메일로 오는 디지털 시대다. 펼쳐 보니 학점은 형편없다. 투수의 방어율로 치면 시즌 MVP 감이다. 그래도 펑크 난 과목 하나 없다는 데 조촐한 위안을 삼는다.

 의외의 순간.
 부모님이 떠오른다. 그간 수많은 성적표를 받아왔다. 이 중 최악의 성적표를 받은 이 순간. 습관적으로 성적표와 부모님의 상관관계가 떠오른다. ‘혼나지 않을까?’하는 지독한 연결고리!

 물론 내 돈 내고 하는 공부에 더해, 어른이 되어 하는 공부는 성적이 어떻든지 부모님께 혼날 이유가 없다. 뭐, 예전에도 성적표를 들이밀었을 때 부모님께 혼나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공부를 잘하지는 못했지만, 공부를 안 한 것 치고는 대략 성적이 나오는 기이한 현상 때문이었다. 지구의 여타 부모님과 마찬가지로 우리 부모님도 항상 얘기한다. ‘우리 아이가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해요.’

 어찌 보면 어른이 되어 하는 공부가 더 무섭다. 성적이 나와도 부모님께 가타부터 칭찬, 꾸중을 들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내 스스로 칭찬, 꾸중을 가한다. 자격증 시험에 떨어지면 돈도 아깝고, 시간도 아깝고, 정신적인 충격도 만만치 않다.
 대학 성적표를 받은 날. 멍하니 벽을 보며 중얼거린다. ‘예전에는 이정도 공부했으면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꾸준히 공부를 하긴 한다. 그런데 어째 꾸준히 머리가 나빠진다. 더 문제는 꾸준히 머리가 나빠지는 게 매년 인지할 수 있는 수준의 낙폭이라는 점이다. 음주가무에 의한 뇌손상이 크나큰 이유가 아닐까? 지구의 여타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항상 되새김질한다. ‘머리 팍팍 돌아가던 젊을 때 공부할 걸.’

 사람의 몸값을 돈으로 환산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한 해 동안 살았던 결과를 성적으로 표시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다만 올해 사 놓은 책보다, 읽지 못한 책들이 더 많다는 것을 볼 때 작년 한 해 내 점수는 높지 않을 것 같다.

 방송대의 성적표를 힐끗 보다 피식 웃는다.
 ‘백분율 78%’ 100점 만점에 78점이라는 뜻이다.
 6과목의 학점은 A-부터 D-까지 다양하다. 그만큼 잘한 것도 있고 못한 것도 있다. 물론 공부를 해도 의미가 없고, 학점에도 반영이 되지 않는 F 학점은 없다.
 그럭저럭 작년 한 해의 과목별 성적표가 이런가 보다.

 어른이 되어 하는 공부다. 누가 시키지 않는 오롯이 자기 인생이다.
 머리가 좋아도 공부를 안 하면 성적이 나오지 않는다. 정직하다.
 성적 때문에 부모님께 혼날 이유가 없다. 내 스스로 혼을 낸다.
 어른은 성적표를 스스로에게 제출하는 껄쩍지근한 순간을 평생, 매해, 매순간 겪어야 하는 성가신 존재다.

 올 해는 어떤 과목을 수강신청 할까? 어떤 목표로 한 해를 살아야 할까?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쉬운 과목을 신청할까, 아니면 깡다구로 점수가 나오지 않더라도 극강의 혐오스런 과목을 신청할까?

 나쁜 성적표를 받아도 엄마한테 혼나지 않을 테니, 나는 예년과 같이 모험을 떠나려고 한다.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서귀포시청 공무원 밴드 『메아리』회장 (악기 : 드럼)
저서 : 『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2015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딥페이크등(영상‧음향‧이미지)을 이용한 선거운동 및 후보자 등에 대한 허위사실공표‧비방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되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삭제 또는 고발될 수 있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