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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한 달리기
정직한 달리기
  • 미디어제주
  • 승인 2016.01.11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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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110>

 하늘이 눈부시다. 태양이라는 존재 때문이다. 해가 중천에 뜬 시간에는 아무리 하늘을 노려봐도 똑바로 볼 수 없다. 이렇게 인간은 능력의 한계를 가끔 보인다. 선글라스로 태양을 마주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냉정한 현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잔재주로 잠시 태양을 피하고 노려보는 것에 불과하다.

 아이의 운동회. 새벽 5시까지 먹은 술은 적당량이 뱃속에 남아있다. 뜨거운 태양은 신진대사를 촉진하고 알코올은 몸속 구석구석을 순환하는지 머리가 지끈거린다.
 서귀포에서 꽤 많은 학생들이 있는 학교답게 운동장이 북적인다. 아이가 참여하는 종목도 몇 개 되지 않는다. 학부모들은 어떻게든 사진을 찍어보려고 난리다. 물론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애초부터 관심이 없다. 더러는 눕고 더러는 돗자리를 깔고 무언가를 먹고 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아이의 달리기 시합. 요즘 달리기는 퓨전인지 중간중간 훌라후프를 돌리고 줄넘기도 하는 모양이다. 준비하는 과정을 보니 여러 사람들이 달라붙어 도구들을 늘어놓는다.
 아이들의 표정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성적표에 등수가 찍히지 않는 세대인 이 친구들은 오랜만에 등수가 매겨지는 피 터지는 경쟁의 무대에 서게 되었다. 부모들도 마찬가지다. 우리 아이가 1등을 하게 되길 바란다. 나 역시 별 수 없다. 숙취에 속이 쓰림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벌렁벌렁거린다.

 아이는 달린다. 날렵한 만큼 눈부신 속도다. 선두를 달린다. 훌라후프의 가운데를 가볍게 통과했다. 그리고 줄넘기. 사실 아이는 줄넘기를 연속으로 하지 못한다. 가르치려 해봤지만 아이보다는 부모가 바빠서 못했다. 결국에는 문제가 터졌다.

 아이는 1등으로 줄넘기 코너에 도착해 열심히 돌린다. 다섯 번을 해야 하는 모양인지 한번 넘고 쉬었다.
 한번 넘고 쉬었다. 뒤에 있는 친구들이 달려온다.
 한번 넘고 쉬었다. 옆에 도착한 친구가 비겁하게 한 번만 넘고 내달린다.
 한번 넘고 쉬었다. 옆에 도착한 친구가 줄넘기를 잡고는 그냥 던져버린 후 내달린다.
 한번 넘었다. 다섯 번을 다 완성했다. 그리고는 다시 달렸다. 이미 다른 아이들은 결승점에 가까이 가거나 도착했다. 아이는 결승점을 향해 외로이 달렸다. 꼴등이었다.

 아이는 결승점을 통과하자마자 엄마에게 내달린다. 커다란 눈물은 운동장에 뚝뚝 떨어진다. 엄마는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나는 옆에서 지켜보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달리기에서 꼴등을 했지만, ‘정직한’ 아이가 자랑스러웠다. 정직한 녀석. 더 이상의 수식어는 필요치 않다.
 아이가 줄넘기를 대충 하거나 비겁하게 스쳐지나갔다면 내 성격상 불같이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올곧게 다섯 번을 했다. 한 번씩 줄넘기를 할 때마다 감동에 가슴이 쿵쾅 뛰었고, 뒤쳐져 있던 친구들이 아이를 앞서 나갈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렇게 처절했던 운동회가 끝나고, 아이에게 맛있는 간식을 사주었다. 아이는 벌써 잊은 모양이다. 회복탄력성 하나는 끝내준다. 신나게 먹어치웠다. 그렇게 가을 운동회는 지나갔다.
 아내는 가끔씩 나에게 얘기한다.

 “착한 사람이 좋은 건 아닌 거 같아.”

 나 역시 동감이다. 착하게 산다는 건 손해 보는 일임에 분명하다. 자기 것 잘 챙기며, 능력보다는 정치와 돈으로 잘나가는 사람이 꽤나 많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치경제사회문화’에 1순위는 정치요, 2순위는 돈이다. 능력은 어디에도 없고, 정직은 허울뿐인 덕목에 지나지 않는다. 아쉬운 사회이자 현실이지만, 인류의 역사상 이러한 논리가 바뀐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석 달이 지난 며칠 전. 아이가 방학숙제로 ‘줄넘기’를 선택했다. 나는 지난 운동회의 줄넘기사건을 잊고 있었는데, 아이에게는 아직까지 상처로 남아있었나 보다.

 착하게 살고 싶고, 정직한 인생을 살고 싶다. 아직까지는 자신 있게 그렇게 살고 있다. 내 아이도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뿌듯하다.
 아버지는 수 천 번 나에게 얘기했다. ‘손해 보는 듯이 인생을 살라.’고. 절대적으로 이렇게 사는 것이 마음이 편하긴 하다.
 아내에게 말하는 내 해석은 이렇다.

 “지구인 73억 중에 1억 명이 착한 사람이라고 하면 살 만한 가치가 있을까, 없을까? 어차피 살아야 하는 인생이라면, 1억 명의 착한 사람들과 그럭저럭 어울리며 사는 게 나을 거야.”

 이런 논리로 나와 아내는 착한 지구인들과 어울리며 살고 있다. 가끔 그렇지 않은 지구인들로 인해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달리기의 승자들이 아닌, ‘정직한 달리기’의 완주자들과 마주하며 살고 있다. 내 아이도 아직까지는 그렇다.
 
 하늘은 아직 어둑어둑하다. 아내와 아이는 아직 자고 있다. 어둑한 하늘에는 변함없이 해가 뜰 것이다. 부끄럽다면 태양을 쳐다보지 못한다.
 결국 손해를 볼 것이다. 다만 다른 부분에서 손해보상을 받는다면, 그게 정직한 달리기의 대가가 아닐까?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서귀포시청 공무원 밴드 『메아리』회장 (악기 : 드럼)
저서 : 『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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