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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친일하세요. 저는 독립운동 할래요”
“아빠는 친일하세요. 저는 독립운동 할래요”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6.03.01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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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窓] 3·1절에 되새기는 최원순·최정숙 부녀의 엇갈린 운명
최원순 최정숙 부녀. 최정숙(왼쪽)은 독립운동가이며, 그의 아버지인 최원순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다시 3·1절이다. 떠오르는 건 대한민국 헌법이다. 헌법 전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대한민국 헌법의 시작은 3·1절이다. 헌법은 왜 이렇게 3월 1일을 중요하게 여길까. 바로 일제에 항거하며 나라를 찾으려 했던 민족정신의 중요성이 있기에 그렇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1919년부터 시작한다고 헌법은 강조한다. 요즘은 ‘이승만 국부론’을 등장시키며 헌법을 부정하려는 도적들도 있지만.

3월 1일이면 다시 새기는 정신이 있다. 나라를 찾으려 투쟁했던 독립운동가들이 죽을 때까지 품고 있었던 나라사랑이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엔 독립운동가라는 이름을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나 여전히 독립운동은 유효하다. 왜 그런가. 그건 앞서 얘기했듯이 헌법이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녀가 일본을 사이에 두고 엇갈린 운명을 맞은 경우도 있다. 너무 잘 아는 최정숙이라는 여성과 그의 아버지인 최원순이다.

최정숙은 독립운동가이면서 교육자로서 이름이 자자하다. 그의 아버지 최원순은 일제강점기 때 검사며 판사를 지냈다. 한쪽은 독립운동가이고, 또다른 한쪽은 친일인물이다. 최정숙은 국가기록원이 최근 펴낸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3.1운동편)>에 수록됐다. 반면 최원순은 민족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들어 있다. 얄궂다면 얄궂을 수 있지만 역사를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최원순 가계는 원래 제주는 아니다. 평양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가 만호라는 벼슬을 제주에서 하게 돼 제주와의 인연을 맺었다고 알려졌다. 그렇다면 최원순은 입도 2대가 되며, 최정숙은 입도 3대인 셈이다.

최정숙은 어릴 때부터 ‘최 검사의 딸’로 불렸다. 최원순은 친일파의 거두인 박영효와도 친분이 깊다. 박영효가 제주에 유배생활을 할 때 알고 지낸 사이였다. 물론 박영효도 최원순의 딸인 최정숙을 아꼈다고 한다.

최원순은 1906년 제주목 재판소의 검사시보로 출발해 정식 검사가 된다. 판사도 된다. 그는 일제 때 판사도 하고 검사도 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그는 일제강점기 때 고위직을 지낸 인물로 <친일인명사전>에 자신의 이름을 등재시키게 됐다.

반면 최정숙은 1919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 학생 79명으로 조직된 소녀결사대에 참가하는 등 독립운동을 하게 된다. 잦은 감옥살이로 건강이 좋지 않던 그는 의술도 배웠다. 해방 후에는 신성여중·여고 교장을 지내고, 우리나라 여성 가운데 처음으로 교육감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3·1절이다.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이 떠오른다. 영화 <암살>도 떠오른다. <암살>에서 이정재가 역할을 한 염석진은 친일이 어떤 것인지를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했다’는 건 말이 안된다. ‘살고자 해서 친일을 했다’는 것도 말이 안된다. 이런 말들이 타당하다면 독립운동을 할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부녀관계인 최원순과 최정숙. 엇갈린 운명이지만 분명한 건 친일을 한 사람이 있고, 일제에 항거하며 투쟁했던 사람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누가 뭐라고 하던 역사의 진실을 묻을 수 없다. 더욱이 오늘은 3월 1일이 아닌가.

<김형훈 기자 / 저작권자 ⓒ 미디어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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