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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해를 보러 새벽에 오르니 신선이 따로 없네”
“떠오르는 해를 보러 새벽에 오르니 신선이 따로 없네”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6.05.01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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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순력도 다시보기] <11> 성산일출봉
‘성산관일’ 중 일부. 성산일출봉 왼쪽에 떠오르는 해가 잘 그려져 있다.

제주에서 최고의 인기 관광지를 들라면 단연 성산일출봉이 아닐까 싶다. 성산일출봉은 관광객 선호도에서 앞 순위를 달리며, 특히 중국인들에게 인기가 높다. 더욱이 성산일출봉은 세계자연유산이 아니던가.

그런 인기는 ‘지금’이라는 현재만 그랬던 건 아니다. 예전에도 성산일출봉은 손에 꼽히는 관광지였다.

이형상 목사가 쓴 <남환박물>을 들여다보면 성산일출봉에 대한 그의 정성을 읽게 된다. <남환박물> ‘경승’편엔 모두 15곳의 가볼만한 곳을 소개하고 있다. 이형상은 이들 15곳의 경승지 가운데 성산일출봉에 대한 서술을 가장 많이 하고 있다.

그렇다면 <탐라순력도>엔 성산일출봉이 어떻게 나올까. 성산일출봉을 전면에 내세운 그림 하나가 있는데, 바로 ‘성산관일(城山觀日)’이다. 이형상 목사는 <탐라순력도>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1702년(숙종 28) 음력 10월 29일, 화북을 시작으로 한 달 만에 제주목으로 돌아왔다고 쓰고 있다. 그런데 ‘성산관일’은 이때의 그림이 아니라, 제주도를 일주하며 순력을 하기 이전의 모습을 담았다. ‘성산관일’엔 음력 7월 13일로 쓰여 있다.

그렇다면 ‘성산관일’은 정기적인 순력 때의 그림은 아닌 모양이다. 순력 때는 제주목을 지켜야 하는 목사가 자리를 비우면 부관인 판관이 제주목을 맡아야 당연하지만 ‘성산관일’엔 판관 이태현도 동행했다. 정기적 순력이었다면 판관이 동행하지 않았을 게다. 정기적 순례 때의 기록을 보면 판관은 제주목을 지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형상 목사가 순력을 시작한 10월 29일 당일의 기록인 ‘화북성조(禾北城操)’엔 판관 이태현은 화북진성까지만 이형상 목사를 모시고 동행하고 곧바로 제주목으로 돌아왔다고 기록돼 있다.

그렇다면 7월 13일 둘러본 성산일출봉은 여행의 성격이 짙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그것도 새벽에 움직인 모양이다. <남환박물>에 그 이야기가 있다.

“수백 보를 가니 비로소 산꼭대기에 이르렀다. 이때가 오경(새벽 4시)이다. 갑자기 동쪽에 점점 빛이 있더니 바다 빛이 점점 밝아졌다. 갓 떠오르는 햇살을 보게 되니 마음이 상쾌하고,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된다고 하여도 지나침이 없을 것 같다.”

이형상 목사는 떠오르는 해에 감동을 받고, 성산일출봉에서 바라본 땅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새벽 일찍 성산일출봉에 오른 감복은 <남환박물>에 차고 넘친다.

“사람 사는 마을이 수십리 밖에 멀리 떨어져 있으니 눈 아래 시끄럽거나 더러운 땅의 모습이 없다. 세속에서 말하는 바, 신선이 과연 있다면 결단코 이 땅을 버리고 다른 곳에 살지는 않을 것이다.”

이형상 목사가 성산일출봉을 몇 차례 올랐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수차례 도전했을 것으로 보인다. <남환박물>에 해돋이를 보려 노력한 사실이 실려 있기에, 충분히 유추가 가능하지 않을까. 그는 제주에서가 아닌, 육지에 살면서 해돋이를 보려고 도전을 했으나 번번이 퇴짜를 맞곤 했다. “동해에서 보았던 것은 매번 안개에 가려 유쾌하지 않았다”고 표현을 한 걸 보니, 성산일출봉에서 맞이한 일출에 감복할만도 하다.

<탐라순력도> 중 ‘성산관일’

그래서인지 이형상 목사는 성산일출봉에 무척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탐라순력도>에 제주도 전체를 그린 지도가 있다. ‘한라장촉’이라는 제목을 단 제주도 지도로, 여기에 성산일출봉의 모습이 유독 크게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이형상이 성산일출봉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는 건 사실로 드러나 있고, 그렇다면 당시 성산일출봉-이때는 ‘성산일출봉’이라는 표현은 하지 않고 ‘성산’이라고만 하고 있다-은 어떤 가치를 지녔을까.

성산일출봉 분화구엔 감귤나무 수백그루가 심어져 있었고, 전략적으로도 무척 중요했다. 왜구가 호시탐탐 노린 곳이기도 하다. 성산일출봉을 소개한 <남환박물>엔 “왜구가 우리 땅을 침략할 때 반드시 이곳에 숨는다”고 표현했다. 오죽했으면 성산 일대에 사람들을 살게 만들려고 노력했을까. 하지만 지금과 달리 많은 사람들을 성산 일대에 옮겨 살게 만드는 일은 실패작이었다. 1637년(인조 15) 성산 서쪽 기슭에 ‘진해당’을 짓기도 했으나 물이 나지 않아 사람들을 옮겨서 살게 하는 건 하지 못한 모양이다. 물이라고 해봐야 봉천수만 있을 뿐이었다. ‘성산관일’에도 진해당의 터를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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