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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구가 많고 안전할수록 ‘나쁜 놀이터’다”
“기구가 많고 안전할수록 ‘나쁜 놀이터’다”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6.05.31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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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육 변화의 항해를 시작하다, 시즌2] <놀이는 교육이다>
5. 공론화의 흐름 ② 놀이터가 달라진다

“형형색색 시설, 푹신한 탄성매트, 얕은 모래사장은 가라”

전남 순천 ‘기적의 놀이터’엔 흙·바위·개울·비탈…스릴 가득

 

놀이터를 떠올려본다. 모래가 있다. 미끄럼틀이 있다. 공간이 조금 더 허락한다면 시소나 정글짐, 깨끗한 철봉이 갖춰져 있을 것이다. 또한, 놀이터는 안전을 추구한다. 아이들이 노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하는 놀이터는 이랬다.

▲놀이터에 대한 새로운 생각

놀이터에 대한 고정관념을 완전히 뒤엎는 생각들이 전국에서 현실화하고 있다. 세계적인 놀이터 디자이너와 놀이전문가들은 “우리 주변의 놀이터들은 ‘놀이터’가 아니며, 진짜 놀이터는 반드시 안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사실 우리에겐 놀이터 디자이너라는 단어조차 생경하다. 그런데 그런 직업을 가지고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이들이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러한 생경한 이들을 한국과 지역으로 초청해 놀이터를 디자인하는 지자체가 있다는 것이다. 남도 저 아래. 습지로 잘 알려진 ‘대한민국 생태 수도’ 순천시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 ‘기적의 놀이터’ 프로젝트

순천시의 기적의 놀이터가 최근 문을 열었다. 순천시는 2년 전 놀이터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이 새로운 움직임은 놀이와 놀이터 디자인에 오래전부터 관심을 가져온 편해문씨(‘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놀이터, 위험해야 안전하다’의 저자)가 순천시에 ‘기적의 놀이터’를 제안하고 순천시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볕이 무더웠던 지난 26일 기적의 놀이터 우물펌프에서 한 아이가 언니와 물놀이를 하고 있다. ⓒ문정임 기자

순천시는 종전의 틀에 박힌 놀이터가 아니라 아이들의 창의력을 키워줄 수 있는 놀이터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2015년 1월 편해문씨와 순천시 공무원 20여명이 전담팀을 구성했다. 이례적으로 민간이 팀장을, 공원녹지사업소장이 간사를 맡았다. 이들은 대상지 확정 후 주민과 인근의 율산초등학생 1061명을 대상으로 의견을 수렴, 2년 만에 공사를 마쳤다.

지난달 26일 취재팀이 이곳을 찾았을 때 기적의 놀이터 ‘엉뚱발뚱’의 첫 인상은 오히려 소박했다. 기적의 놀이터는 20층이 넘는 고층 아파트 단지 사이에 여느 평범한 놀이터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놀이터 가운데 모래사장이 있고, 양쪽으로 개울처럼 물이 흘렀다. 경사진 비탈을 활용해 땅속으로 심은 원통형의 미끄럼틀이 이채롭다면 이채로운 정도였다. 하지만 공사 후 초등학생들의 감수를 받았다는 이곳 기적의 놀이터에는 아이들의 상상력을 방해하지 않기 위한 여러 배려와 장치가 곳곳에 숨어있었다.

▲ 놀이터에 놀이가 숨어있어요

우선 야산 밑에 자그마하게 위치했던 놀이터는 비탈진 산의 일부를 최대한 이용하는 것으로 활용 면적을 넓혔다. 편해문 총괄 디자이너는 “순천시의 여러 후보지 가운데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굴곡진 지형 때문이었다”며 “기울어진 땅은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매우 좋다”고 설명했다.

놀이터 양쪽에 물이 흐르도록 한 것은 아이들은 무릇 물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인공 개울에는 부모 세대가 썼음직한 수동 우물펌프가 화려한 색동옷을 입고 설치됐다. 마중물을 넣고 긴 손잡이를 들었다 내릴 때마다 물이 콸콸 쏟아졌다. 아이들은 환호했다.

'기적의 놀이터' 조감도. 순천시 제공

아이들이 탐험을 하려면 큰 나무도 필요했다. 하지만 아이들의 놀이를 위해 멀쩡한 큰 나무를 벨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때 수해로 거대한 팽나무가 고사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아이들은 그렇게 놀이터로 옮겨진 나무 위에서 균형도 잡고 숨기도 하면서 새로운 놀이를 발견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상상력에 찬물을 붓지 않으려면 모래의 깊이가 중요하다. 모래를 앞에 두고 아이들이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은 모래를 파는 일이다. 그런데 보통의 놀이터는 고작 30㎝ 정도에 불과하다. 이곳은 1m10㎝에 이른다. 편해문 총괄 디자이너는 “아이들에게는 땅속 끝까지 모래를 파고 싶은 욕망이 있다. 금세 콘크리트 바닥이 드러나는 놀이터에서는 재미를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모래 입자는 굵은 종류와 가는 종류를 두 가지를 구비했는데, 기적의 놀이터가 완공된 후 이곳을 방문한 일본의 한 놀이터 전문가가 입자가 더 작은 모래이면 좋겠다는 조언을 건넸다는 후문도 들렸다.

순천시는 기적의 놀이터 이름을 국어사전에도 없는 '엉뚱발뚱'으로 붙였다. 사진은 놀이터 입구. ⓒ김형훈 기자

모래는 관리가 중요하다. 해가 저문 뒤 아이들이 떠난 놀이터에 고양이들이 배설을 위해 찾으면 모래가 더러워진다. 때문에 이곳에는 매일 노을이 질 때쯤 노란 조끼를 입은 공무원들이 모래사장을 천막으로 덮기 위해 들른다. 놀이터 하나에 그렇게 정성을 들여야 하나 유난스럽다 하겠지만 일본에서는 흔한 풍경이다.

또 하나, 놀이터가 즐거우려면 아이들이 편히 놀도록 어른들이 보채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놀이터 곳곳에는 어른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의자와 평상을 넉넉히 만들어 두었다.

▲놀이터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라

기적의 놀이터 전담팀은 놀이터를 기획하면서 몇 가지 기준을 세웠다. ‘놀이기구를 최소화할 것’ ‘대신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놀이요소를 곳곳에 디자인으로서 숨겨놓을 것’ ‘위험요인은 제거하되 아이들이 위험을 극복할 수 있는 건강한 리스크는 남겨둘 것’ 등이다.

순천시가 예산 4억원을 투입해 새로운 놀이터 만들기에 참여한 것은 지금의 놀이터들이 ‘놀이’ 터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미끄럼틀과 그네가 중앙을 차지하는 우리 주변의 놀이터들을 ‘지시적 놀이터’라고 지칭한다. ‘미끄럼틀은, 이 계단으로 올라가 저 경사면으로 내려가야 한다’거나 ‘그네는 반드시 앉아서 앞뒤로 흔들어 타야 한다’는 등의 이용방법을 암묵적으로 아이들에게 강요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호기심보다 통제를 가르치는 셈이다.

반면 순천시의 기적의 놀이터는 모험, 위험, 탐험을 중시한다. 아이들을 다치지 않게 한다는 고무탄성 바닥을 걷어냈고 종합 놀이대를 없앴다. 흙과 나무, 돌, 물 등 자연물을 중점 배치함으로써 건강한 위험이 있는 놀이터, 변화와 의외성이 있는 놀이터, 실험과 도전을 일으키는 놀이터를 아이들에게 선물하고자 했다. 이곳의 모토는 ‘스스로 몸을 돌보며 마음껏 뛰어놀자’이고, 이러한 철학을 나타내듯 놀이터의 애칭은 국어사전에도 없는 ‘엉뚱발뚱’이다.

편해문 총괄 디자이너는 “오로지 안전하기만 한 곳은 아이들을 수동적으로 만들고 상황 대응력을 감소시킨다”며 “부모들의 과잉보호가 아동학대 만큼 아이들에게 해롭다 점을 인식하고, 놀이터에서만큼은 간섭하고 통제하려는 문화를 바꿔나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영국에서는 놀이터가 너무 안전하면 오히려 불합격시킨다”는 말도 전했다.

취재팀이 순천시의 기적의 놀이터를 방문했던 이날 순천만국제습지센터에서는 순천시 기적의 놀이터의 개관을 기념하는 ‘어린이 놀이터 국제 심포지엄’이 열리고 있었다.

조충훈 순천시장의 환영사가 인상적이었다. “예전에는 공장을 많이 유치하는 사람이 유능한 시장이었지만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다. 21세기에는 인간의 삶, 행복, 자연이 중요하다. 지금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없다. 아파트 준공검사를 받기 위해 만들어진 ‘공문 놀이터’는 아이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만들어졌다. 모래를 파면 깊이가 15㎝도 되지 않는다. 심지어 모래가 흩날리면 아파트가 지저분해진다며 놀지 못하게 입구를 막아둔 놀이터도 있다. 순천시의 기적의 놀이터는 우리 주변의 놀이터들을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열어줄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시작됐다.”

순천시는 연향2지구 호반3공원에서 들어선 1호를 시작으로 2020년까지 기적의 놀이터를 10곳까지 늘려 나갈 계획이다.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제주매일 문정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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