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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그리고 제주 이야기
“목자로 불리운 말테우리의 삶은 힘든거라네”
[탐라순력도 다시보기] <19> 감목관과 목자
데스크승인 2016.11.04  09:10:02 김형훈 기자 | coffa@naver.com  
   
<탐라순력도>의 '공마봉진' 장면.

앞서 조선초 명나라에 보낸 말은 어림잡아 10만마리가 될 것이라고 추산했다. 여기의 상당수는 제주에서 보낸 말이다. 제주가 최대의 말 생산지인 것은 분명하지만, 때문에 좋은 말은 죄다 빠져나간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고 전편에 지적했다.

말은 예전엔 정치·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다음 글을 보면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각 도의 목장의 말들이 새끼를 얼마나 쳤는지, 또 먹여 기르기를 열심히 했는지 게을렀는지를 사복시의 양마원(養馬員)이 제대로 검사하지 않아 말의 번식하는 수효가 적습니다. 이제부터는 제주의 예를 따라 목자(牧子)를 정하십시오. 번식시킨 것이 많은 자는 상을 주고 적은 자는 벌을 주며, 마음을 쓰지 않아 말을 죽게 한 자는 말의 값을 받아 노비로 만들고, 노비 자식을 목자로 정하도록 하십시오. 또한 목장이 있는 각 고을의 수령은 모두 감목관으로 겸하게 하고, 오로지 말 기르는 일을 맡게 하십시오.”<세종실록 18권, 세종 4년(1422) 윤12월 20일>

충청도 관찰사의 보고를 병조에서 검토, 이를 세종에게 올린 내용이다. 충청도 관찰사는 사복시(말 등을 관장하는 기구)에서 보낸 관리가 제대로 일을 하지 않고 폐만 끼친다고 주장하고 있다. 때문에 이를 고칠 것을 건의했고, 병조는 제주도처럼 목장이 있는 곳의 수령이 감목관을 겸하도록 하면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고 제시한 것이다.

제주에 감목관이라는 직위가 설치되는 건 태종 8년(1408) 때다. 제주에 있던 성주(星主)제도가 사라진 4년 뒤의 일이며,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제주도는 동도와 서도로 나눠져 있었다. 그렇다고 예전에 제주에 말을 관리하던 직위가 없던 건 아니었다. 원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관련 체제는 더 잘 갖춰져 있었다. 달리 말하면 감목관을 두면서 말을 관리하는 체제가 구축된 건 아니고, 고려 때부터 존재하던 ‘애마자장관’을 감목관으로 고쳐 불렀을 뿐이다.

태종 16년(1416)엔 제주의 행정구역이 3읍 체제로 갖춰지는데, 잘 아는 제주목·대정현·정의현 체제이다. 예전 동·서 체제 때의 동도는 정의현으로, 서도가 대정현으로 개편된 것이다. 그러니까 3읍에 감목관을 두게 된다.

그렇다면 감목관은 누가 맡았을까. 당시 제주도의 특징적인 조직을 따져봐야 한다. 제주목에 파견된 제주목사는 정3품이다. 사실 제주목사는 전라도관찰사(종2품)의 지휘와 감독을 받아야 했으나, 제주도라는 섬 특징 때문에 제주도 전체를 맡아서 관할하게 된다. 조선시대는 각 고을의 수령은 품계에 상관없이 병렬 관계였다. 품계가 높은 목사라고 하더라도 현감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제주목사도 수령이고, 대정현·정의현의 현감도 수령이기에 수직관계는 형성될 수 없었다. 그런데 제주목사에겐 마치 관찰사처럼 제주도 전체를 다스릴 수 있도록 ‘병마수군절제사’를 겸할 수 있었다. 따라서 같은 수령인 대정현·정의현의 현감도 제주목사의 관리대상이었다.

감목관은 대정현과 정의현의 현감과 제주목의 목사 바로 아래 단계였던 제주판관 등 3명이 감목관 역할도 겸하게 됐다. 세종 4년 병조에서 보고한 내용은 바로 제주도 3읍에 있던 감목관처럼 목장이 있는 다른 지역의 수령도 모두 그런 역할을 하도록 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세종실록>의 위 기사를 다시 들여다보자. 내용 중 목자(牧子)가 눈에 띈다. 이 기사 내용 가운데는 “노비 자식을 목자로 정하도록 하자”는 내용이 있다. 우선 목자부터 알아보자. <조선왕조실록>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목자는 귀양과 관련된다. 조선 태조, 즉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임금이 되기 전에 그를 따르던 이응 등이 통신수단으로 이용되던 역참의 말을 빼앗는 일이 방생한다. 이때 태조는 문제를 일으킨 일당들을 귀양 보내는데, 지파안이라는 사람을 압륭 지역의 목자(牧子)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첫 목자 기록이다. 압륭은 조선의 동북쪽 일대로 여진족의 왕래가 많던 함경도의 어느 지역으로 보인다. 거기에서 말을 관리하도록 시켰던 셈이다.

목자는 제주어로 하면 ‘말테우리’가 된다. 말을 직접 관리하는 일을 맡는 이들이 목자였다. <세종실록>으로 다시 돌아간다. 노비 자식을 목자로 정하도록 하자는 내용이 있는 걸 보면 목자 신분 자체가 아주 낮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목자라는 신분이 조선 때 등장한 건 아니다. 말 관리 기술을 전파했던 원나라 때부터 있었다. 몽골은 말을 다스리는 기술에 능했던 ‘하라치’를 제주에 보냈다. ‘하라치’는 몽골어로 ‘마유주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특별히 선발돼 제주에 배치됐다. ‘하라치’는 목장을 관리하는 뜻인 목인(牧人)로 해석이 되며, 고려 때는 몽골에서 왔기에 그들을 ‘목호(牧胡)’라고 불렀다. 앞서 제주도는 조선시대 3읍이 되기 전에 동서 체제였다고 했다. 동서 체제였을 때 하라치로 불리는 몽골 출신 목호들이 제주에 정착하며 말을 기르는 기술을 전파했고, 제주에서도 그런 역할을 하는 이들이 등장하게 된다. 그들을 목자(牧子)로 불렀다.

목자의 신분은 매우 낮았다. 노비 계층만이 목자는 아니었다. 맡은 일 자체가 사회적으로 다소 천대받았을 뿐이다. 세종 13년(1431) 감목관 고준의 상소 내용을 논의, 이에 대한 결론을 담은 게 있다.

“목자(牧子)는 자산이 착실히 있는 자를 택하여 정하고, 마필의 번식을 등급을 나누어서 그 실효가 있는 자는 포상을 하고, 임무를 다하지 못하면 죄를 따질 것이다. 봉족(奉足)도 상당한 남정(男丁)을 준다는 조건에 대해서는 맹사성 등은 모두 옳다고 했으나, 정초가 반대했다.”<세종실록 51권, 세종 13년(1431) 3월 14일>

위 기사는 어느 정도 재력이 있는 이들을 목자로 두려고 했고, 그들이 말 관리에만 힘을 쏟음에 따라 집안을 도와줄 인력 보충을 논의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성사되지는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대로만 됐더라면 목자의 실태가 나빠지지 않았겠지만 대개는 힘든 생활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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