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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그리고 제주 이야기
“수말을 낳으면 아예 죽여 버리고 기르지 않습니다”
[탐라순력도 다시보기] <21> 말테우리의 고단한 삶
데스크승인 2016.12.28  17:17:20 김형훈 기자 | coffa@naver.com  

세종 때 제주말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목장이 만들어졌다고 앞서 설명했다. 그게 바로 10소장이다. 하지만 말을 관리하는 건 제주도 사람으로서는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이번에 말과 관련된 제주도민들의 고통을 살펴보자.

10소장이 확립된 건 세종 12년(1430)의 일이다. 고득종의 상소를 받아들여 목장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게 된다. 당시 제대로 관리되지 않던 말과 관련된 행정을 정비했다. 그렇긴 한데, 말을 관리하는 이들은 고통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목자라고 불리는 말테우리는 신분은 양인이면서도 천민 취급을 받아야 했다. 말테우리는 16세 때부터 관련 일을 해야 하고, 60세까지 그들에게 일이 주어졌다. 그 대가로 땅을 받고, 벼슬도 올라갈 기회가 주어지기는 했다. 그러나 벼슬이 올라가거나 그런 일은 흔치 않다. 조선시대는 양인도 벼슬을 할 수 있도록 법제화되긴 했으나 허명의 문서인 것처럼, 말테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말테우리라는 직업은 대대로 세습됐다. 세습이라는 건 거주이전도 쉽지 않았다는 말이다.

“목자(牧子) 명부가 작성되지 않은 까닭에 이사한 자, 새로 태어난 자, 사망한 자를 살피기가 어렵습니다. ‘속육전’을 보면 각 도의 목자 가운데 부자가 세습해 명부에 오른 자를 제외하고는 역(役)이 없는 백성들로 목자를 충당해 이들을 ‘군(軍)’이라 일컫고 명부를 따로 작성하게 하고, 목자의 명부는 지금까지 작성되지 않았습니다. 각 도로 하여금 목자를 모조리 찾아내 명부를 작성하도록 하십시오.”<세종실록 40권, 세종 10년 4월 7일 기미>

위 기사를 들여다보면 말테우리는 세습하도록 하고, 그걸 명부에 기록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사를 가거나, 새로 태어나도 명부에 올리지 않는 문제 때문에 말테우리들을 모조리 찾아내도록 하고 있다.

말 관련 행정이 차츰 체계를 갖추면서 말테우리가 관리해야 할 말 수도 점차 늘었다. 태조 당시엔 10마리에서, 세종 때 들어오면 25마리로 늘어난다. <경국대전>엔 아예 법제화되는데, 4명의 말테우리가 암말 100마리와 수말 15마리를 관리하면서 매년 85마리의 망아지를 생산하도록 하고 있다.

문제는 말은 관리만 잘 해서 될 일도 아니었다. 도둑을 맞는 일도 흔했다. 다음은 예종 1년(1469) 때 고택이 올린 상소이다.

“제주는 좋은 말이 많이 나고, 해마다 번식합니다. 그런데 서울과 여러 지역의 도적을 모두 3읍(제주목·대정현·정의현)에 나누어두니 말을 훔치곤 합니다. 강도로 유배를 온 장오을미 등이 무리를 만들어 도둑질을 일삼습니다. 말을 훔쳐서 숨겨두었다가 팔기 때문에 목자들은 도둑맞을 것을 우려해 작은 목장을 축조합니다. 때문에 풀은 부족하고 말들은 모두 야위어 새끼를 쳐서 번식을 하지 못합니다. 또한 육지에 사는 잡인들도 장사를 빙자해 제주에 들어왔다가 도적들과 짜서 말을 몰래 빼갑니다.”<예종실록 3권, 예종 1년 2월 29일 갑인>

제주의 상인들이 산 말은 뭍에 나갈 허락을 맡아야 했다. 제주목사의 승인이 떨어져야 말을 반출할 수 있었다. 이 때 낙인을 하는데 ‘시(市)’라는 글자를 찍었다. 앞서 상소를 올린 고택은 ‘시(市)’자 낙인이 없는 말을 얻은 이들은 모두 고발을 해달라고 호소할 정도였다. 그만큼 도둑질의 희생양이 되는 건 말테우리였다.

   
검토관 김물이 제주에 와서 말을 점검할 때 내용이다. 민간에 있는 수말은 관아에서 모두 빼가니 수말이 나면 죽여서 기르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수탈이 심해서 수말이 태어나면 죽이는 경우도 허다했다. 수말은 목사나 현감 등 수령들의 수탈 대상이 종종 됐기 때문이다.

“대정현에 갔는데 부씨 노인을 만났습니다. 울면서 제게 말하길 수말이 나면 즉시 빼앗긴다고 말했습니다. 수령의 자제나 군관들이 사냥을 나갈 때는 모두 백성의 말을 빼앗아 타고서 온 종일 몰고 다니니, 지쳐서 죽는 말이 많습니다. 수말을 낳는 집이 있으면 아예 죽여 버리고 기르지를 않습니다. 또 백성 중에서 나라에 말을 바치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수령이 그것을 가로막고 가져와 바치지 못하게 합니다.”<성종실록 247권, 성종 21년 11월 5일 계미>

위 기사는 검토관 김물이 올린 상소이다. 김물은 검토관으로 제주에 갔다가 곽심과 함께 말을 점검한 뒤 서울에 돌아와 성종에게 제주에서 겪었던 일을 보고했다. 이 얘기를 전해들은 성종은 어땠을까. 성종은 곧바로 ‘개차(改差)’하라고 한다. 개차는 벼슬아치를 물갈이 한다는 뜻인데, 5일 후에 도승지 신종호가 이와 관련된 문제를 성종에게 얘기한다.

신종호는 “전부가 수령의 잘못은 아니다. 지금 수령을 모두 내쫓으면 제주도 백성들이 수령이 자주 바뀌는 것을 습관적으로 보게 돼 다투어 고발할 것이다”며 김물의 상소를 듣지 말라고 임금에게 보고한다. 그럼에도 신종호 얘기를 들은 성종은 “가혹한 정치는 사나운 호랑이보다 더 심하다”며 “반드시 개차해서 다음 수령들의 본보기가 될 것이다”고 했다.

그렇다면 결과는? 당시 제주목사는 이종윤이다. 이종윤은 그해 5월에 제주목사로 부임하는데 물갈이 되지는 않는다. 대신 이종윤은 관아에서 술자리를 열고 하는 등의 일을 폐지하라는 교지를 받는다. <조선왕조실록>엔 그 이유를 이렇게 쓰고 있다. “제주 점마 별감인 곽심과 김물이 폐단을 알렸기 때문에 이런 교지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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