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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그리고 제주 이야기
“조선군은 싸울 줄도 몰랐고, 싸우는 방법도 몰랐다”
[탐라순력도 다시보기] <26> 임진왜란 초기에 질 수밖에 없는 이유
데스크승인 2017.05.04  04:24:03 김형훈 기자 | coffa@naver.com  

조선이라는 나라가 세워지고 200년간은 대체로 평온한 상태를 유지한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이처럼 긴 기간동안 외침이 없던 때를 고르라면 고구려·백제가 멸망하고, 신라가 발해와 2국체제를 유지한 때가 유일했다. 당시 신라는 200년 조금 넘는 기간 외부의 침략을 받지 않은 시기였다.

 

후삼국을 통일하고 한반도의 맹주가 된 고려는 상대적으로 잦은 외침을 겪었다. 거란과 몽골 등의 침략이 있었고, 결국 몽골에 무릎을 꿇기도 했다. 이후 등장한 조선은 명나라를 방패삼아 긴 휴전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1392년 이후 일본의 침공을 받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까지 정확히 200년은 주변 나라로부터 대규모 공격을 받지 않았다. 물론 왜구의 잦은 침입은 상존하기는 했다.

 

전쟁 없이 사는 날이 길어서였을까. 앞선 시간을 통해 조선시대의 군사제도가 바뀐 점을 열거했다. 군 복무는 흐트러졌고, 군사 업무를 베[布]로 내게 하는 ‘군적수포제’가 도입됐다고 했다. 그게 바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1년 전이었다. 오죽했으면 군복무를 하는 정군(正軍)은 군사일에 투입되는 게 아니라, 허드렛일에 투입되곤 했을까. 그래서 전 시간에 조선군인은 ‘오합지졸’이라는 말을 꺼냈다.

 

우린 임진왜란을 두고 일본의 조총에 견디지 못했다고 평가를 하곤 한다. 비록 조총이 신무기였지만 무기의 역할이 조선군에 참패를 가져다 준 건 아니었다. 침략을 해 온 일본군이 무서워하는 조선의 무기도 있었다. 중요한 건 아무런 싸울 태세가 되지 않은 조선의 상황이 문제였다. 이번 시간은 그 얘기를 중점적으로 해보겠다.

 

조선은 임진왜란이 있기 전 일본의 침략을 눈치 채고 있었다. 일본으로 사신 일행을 보냈다는 건 익히 아는 일이다. 조선은 임진왜란 발발 2년 전인 1590년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을 일본에 보내 동태를 파악하도록 한다. 1년 후에 이들 일행이 돌아오게 된다. 흔히 황윤길은 전쟁 상황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고, 김성일이 일본은 침략하지 않는다고 보고했다고 돼 있다. 그러나 유성룡의 <징비록>을 들여다보면 그렇지는 않다.

 

   
임진왜란 당시 상황을 잘 그려내고 이는 유성룡의 '징비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황윤길과 김성일은 선조 임금을 만나 1년을 둘러본 일본의 상황을 전달한다. 황윤길은 “병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고, 김성일은 “그런 정세를 보지 못했다. 황윤길이 인심을 동요시키는 건 옳지 못하다”고 했다. 조정은 황윤길과 김성일의 말에 둘로 갈리고 되고, 이를 본 유성룡이 김성일에게 “정말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묻는다. 그러자 김성일은 유성룡에게 “어찌 왜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단언하겠는가. 다만 황윤길의 말이 너무 지나쳐 중앙과 지방의 인심이 놀라 당황할 것이므로 이를 해명했다”고 돼 있다. 김성일 역시 일본 침공을 예견하고 있었다. 조선은 곧바로 명나라에도 김성일 일행이 일본에 다녀온 정황을 보고했을 정도이다.

 

일본이 침략할 조짐을 알아챈 조선은 곧바로 국방에 밝은 이들을 뽑아 충청·전라·경상 3도를 순찰하며 지키도록 했다. 그걸로 그치지 않았다.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해 성을 새로 쌓게 된다. 그런데 원성이 자자했다. 200년간 평온을 유지해온 조선이었기에 갑작스런 성 수축은 불만만 쌓이게 만들었다. 그러다보니 성이 제대로 수축될 리 없었다. 우리나라의 성은 땅의 형태에 맞춰 쌓는 게 보편적이었으나 이 당시 쌓은 성은 그걸 무시하곤 했다.

 

특히 성을 방어용으로 만들기 보다는 넓고 크게 만들어 사람을 수용하는데 신경을 쓰곤 했다. 때문에 진주성은 임진왜란 때 큰 피해를 보게 된다. 진주성은 험준한 곳에 터를 잡고 있어서 적이 쉽게 쳐들어오지 못하게 돼 있으나 동쪽으로 평지까지 확장해서 성곽을 만들게 된다. 결국 성을 지키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다.

 

왜군이 조선을 침략하는 건 1592년 4월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군 15만명을 편성하고, 음력 4월 12일 부산포로 들어온다. 부산포는 침략한지 하루만에 함락된다. 왜군이 당시 한양인 서울까지 오는데도 힘이 들지 않았다. 서울은 부산포가 함락된지 한달도 되지 않아 적의 손에 넘어갔다. 그때가 5월 2일이다. 20일만에 적군이 부산에서 서울로 갔다는 말인데, 당시 조선 군사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지금도 하루에 걸어서 25㎞씩 걸어야 부산에서 서울까지 20일만에 갈 수 있다. 왜군은 제대로 된 싸움을 하지 않고 간단히 서울을 접수했다는 얘기밖에는 안된다. 조총의 승리였다는 건 그래서 성립이 되지 않는다. 싸울 준비가 되지 않은 조선군은 도망치기에 바빴다.

 

이렇게 된 데는 방어체계의 문제도 있었다. 당시 조선은 적이 쳐들어오면 한 곳에 군사를 집중시켜서 막아내는 ‘제승방략’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산포를 시작으로 차례차례 무너지면서 제승방략은 효과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전에 ‘진관체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다. 진관체제는 각 지역 수령이 군 지휘권을 가지고 자체적으로 방어하는 체계였다.

 

유성룡은 “장수없는 군사들이 들 가운데 모여 천리 밖에서 장수 오기를 기다리다가 장수는 제때 오지 않고 적군의 선봉이 먼저 닥친다면 군사들이 놀라고 두려워할 것이니 반드시 패전하는 법이다”면서 진관체제로 복귀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본이 20일만에 부산에서 서울로 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런 군사체계도 들어 있다. 그렇다면 무기는 어땠을까. 다음 호에 조선의 무기와 왜군이 지닌 무기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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