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특집 > 박물관, 그리고 제주 이야기 | 탐라순력도 다시보기
박물관, 그리고 제주 이야기
“중요성 입증된 조총은 결국 과거시험 과목으로 등장”
[탐라순력도 다시보기] <28> 조선시대의 조총
데스크승인 2017.09.06  08:40:47 김형훈 기자 | coffa@naver.com  

좋은 무기를 가지고 있던 조선은 조총의 실력을 무시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보병전에서 조총은 조선의 생각과는 달리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했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신립이 탄금대에서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배수진을 쳤지만 전멸했던 이유는 조총에 대비한 작전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지닌 조총은 연발사격은 불가능했다. 한번 쏘면 재장전을 해야 했다. 때문에 일본군은 조총의 능력을 배가시키는 전술을 폈다. 조총병이 먼저 나서고 2선으로 후퇴하면서 재장전을 하는 사이에 활을 쏘는 궁병이 나선다. 그 후 다시 조총병이 나서고 하는 식이다. 이같은 전술은 일찌감치 구현됐다. 일본 전국시대 오다 노부나가는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이런 전술을 사용하며 전국 통합의 길을 열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음 권력을 이어갈 수 있었다. 결국 도요토미는 조총을 잘 활용하는 전술을 조선의 땅에서 펼쳤던 게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듬해인 선조 26년(1593)은 전세가 완전 바뀐 해이다. 조선군은 명나라와 연합군을 형성, 1월 평양을 수복한다. 한양을 버리고 떠났던 선조는 10월에 도성에 복귀를 한다. 1593년은 경상도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수복되는 등 안정을 찾아가는 시점이다.

 

   
<탐라순력도> 41점 가운데 ‘제주조점’을 확대한 그림으로, 총을 든 포수들의 모습이 보인다. 밑에서 2번째 줄이 조총을 든 포병이다. ©미디어제주

 

어느 정도 안정화된 조선은 1593년 별시를 치른다. 이때 처음으로 무과에 조총시험을 보게 한다. 원래 무과시험은 목전(나무살 쏘기), 철전(쇠살 쏘기), 편전(애기살 쏘기), 기사(마상궁술), 기창(마상창술), 격구 등이었으나 변화가 시도된다. 1593년 7월에 과거를 치를 규정이 제때 만들어지지 않자 선조가 조총을 무과의 시험 과목에 편입시키라는 장면이 등장한다.

 

“철전 시험은 통과를 했으나 말 위에서 활을 쏘는 기사인 경우 맞히지 못했거나 맞힌 한도가 부족한 이들은 조총 세 자루를 쏘게 하라. 그래서 조총을 한 번 이상 맞힌 자는 모두 뽑으라.”<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 7월 14일 병인>

 

쫓기다시피 도성인 한양을 등지고 떠난 기억이 있는 선조로서는 그 치욕을 과거시험으로라도 되갚고 싶었던 모양이다. 선조가 이미 무과시험에 조총 종목을 넣을 것을 지시한 가운데, 다른 관리들도 조총의 필요성에 공감을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보니 과거시험 종목 가운데 목전(나무살)의 불필요성도 논의가 된다. 선조는 1593년 10월에 관료들과 왜적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면서 목전의 불필요성을 꺼냈고, 유성룡 등의 공감을 끌어냈다는 대목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선조는 그걸로 끝나지 않고, 문과 시험에도 무술을 시험 보게 해야 한다는 얘기를 꺼냈다.

 

“도요토미가 죽는다 하더라도 일본은 우리나라와는 영원히 풀 수 없는 원수인데, 이런 때 규정에 구애될 수 있겠는가. 듣건대 경상도의 풍속은 누구라도 아들 형제를 두었을 때 한 아들이 글을 잘 하면 마루에 앉히고, 한 아들이 무예를 익히면 마당에 앉혀 마치 노예처럼 여긴다니, 오늘날 우리나라에 이런 일이 있게 된 것은 경상도가 잘못된 길로 이끈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책자만 가지고 교육하므로 문무를 두 갈래로 만들어놓았으니 참으로 할 말이 없다.”<선조실록 43권, 선조 26년 10월 22일 임인>

 

16세기 당시 경상도는 문무 차별이 심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정작 선조는 임진왜란 초기의 문제점을 마치 경상도 때문이라는 식으로 언급하고 있다. 전투력을 상실한 16세기 조선의 문제를 경상도에 화살을 돌리다니, 참 웃기다.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은 일본 침략 2년째, 훈련도감을 설치한다. 임시기구였던 훈련도감은 선조 27년에는 상설기구로 격상된다. 임진왜란 초기에 참패를 당한 조선은 군사조직의 재정비 필요성을 공감하게 됐고, 새로운 군사체제를 도입한 게 훈련도감이었다.

 

훈련도감에 소속된 군사들은 총을 쏘는 포수(砲手), 창을 다루는 살수(殺手), 활을 쏘는 사수(射手)로 구분됐다. 또한 훈련도감에 소속된 병사는 급료를 받는, 지금으로 말하면 모병제 형태였다. 1인당 1개월에 쌀 여섯 말의 급료를 받는 병사로 근무하게 했다.

 

그런데 훈련도감 초기에 병사들이 사용한 조총은 조선이 직접 만들기 보다는 일본군에게 거둬들인 게 많았던 모양이다. 비변사에서 선조에게 조총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대목이 나온다. 눈에 띄는 대목은 ‘면천(免賤)’이다. 즉 천민에서 해방을 시켜주겠다는 대목이다. 총 쏘는 법을 가르쳐서 기예가 뛰어날 경우에 ‘면천’을 해준다면 포수를 할 이들이 늘어날 수 있다는 얘기를 꺼내고 있다.

 

이런 제도 시행으로 천민에서 해방된 이들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전쟁이 새로운 문화를 만든 건 사실이다.

 

시대는 변하기 마련이다. 조총을 무시했던 조선은 조총을 쓰게 됐고, 과거시험에도 정식 과목으로 인정했으니 말이다. 조총의 위상이 올라가면서 조선에서도 조총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진다.

 

“교전할 때는 조총이 가장 편리한 병기인데, 근래에 도감에서 사용되는 조총은 모두 왜인의 물품을 거둔 것으로 숫자가 많지 않고, 더러는 깨지거나 훼손돼 나날이 마모되어 줄어듭니다. 만일 서울에서 솜씨 있는 대장장이 5~6명을 뽑아 도감에 와서 기술을 습득하게 한 다음에 탄과 철이 넉넉한 황해도·충청도 바닷가로 나누어 보내 계속 조총을 만들고, 조총을 잘 아는 사람을 수령으로 삼는다면 조총을 사용하는 방도가 나날이 확장되어 익히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선조실록 49권, 선조 27년 3월 1일 기묘>

 

   
<탐라순력도> 중 '제주조점'. ©미디어제주

 

일본은 1543년 포르투갈인으로부터 조총을 받아들였다. 일본은 그 조총으로 전국통일의 발판을 삼고, 조선 침략도 감행했다. 조선은 조총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그걸 무시하다가 1593년에야 조총 제작에 나선다. 조총이라는 무기 하나로만 본다면 조선과 일본의 격차는 50년이 된다.

 

전쟁은 참혹하지만, 전쟁은 무기체계의 발전을 가져온다. 전쟁이 가져다 준 조총은 17세기 이후에는 조선의 중요한 무기체계를 이룬다. <탐라순력도>에 등장하는 조총도 그 산물이다. 조총은 제주에서도 주력부대의 일원을 이룬다. 제주성의 군사력을 점검하는 ‘제주조점’에도 총을 든 포수들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아울러 ‘교래대렵’에는 총을 쏘는 그림이 있다. <탐라순력도> 그림 가운데 유일하게 총을 쏘는 장면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장면들은 한참 후에나 등장했을지도 모른다.

 

<김형훈 기자 / 저작권자 ⓒ 미디어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형훈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 댓글 1
전체보기
  • 역사를 알게해요 2017-09-06 08:52:16

    참으로 좋은 해설입니다~~
    조선의 역사와 함께 제주를 알게되네요^^   삭제

    SPONSO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