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9 13:02 (금)
“한짓골은 일도·이도·삼도동을 가르는 중요한 곳”
“한짓골은 일도·이도·삼도동을 가르는 중요한 곳”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7.09.21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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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이야기] <3> 원도심 ‘삼각지’ 한짓골
일제강점기 때인 1913년 첫 지적도에도 마을 확인돼
1952년 도시계획 이후 굽은 도로는 ‘불편’ 인식 확산
<세종실록지리지>에 담긴 일도, 이도, 삼도 관련 내용이다. 세 신인이 결혼 한 뒤 양을나는 일도, 고을나는 이도, 부을나는 삼도에 나눠 살았다고 돼 있다.

 

“제주는 전라도의 남쪽 바다 가운데 있다. 옛 기록에 이르기를 태초에는 사람과 물건이 없었는데 신선 세 사람이 땅으로부터 솟아나왔다. (중략) 첫째를 ‘양을나(良乙那)’, 둘째를 ‘고을나(高乙那)’ 셋째를 ‘부을나(夫乙那)’라고 했다. (중략) 세 사람이 나이 차례대로 나눠서 혼인하고, 샘이 좋고 땅이 기름진 곳에 나아가서 화살을 쏘아 살 땅을 선택했는데, 양을나가 사는 곳을 제일도(第一都), 고을나가 사는 곳은 제이도(第二都), 부을나가 사는 곳을 제삼도(第三都)라고 했다.”

 

# 옛 기록에 나타난 일도·이도·삼도

 

조선 세종이 죽은 뒤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오는 내용이다. <세종실록지리지>는 단종 2년(1454) 때 만들어졌다. 조선 때 기록을 새삼 꺼내는 게 생뚱맞을 수도 있지만 제주시 원도심을 알기 위해서는 이 기록을 알아야 한다. 현재 일도·이도·삼도동의 근원일 수도 있는 기록이기에 그렇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오는 제주는 당시 전라도에 속해 있었고 ‘제주목(濟州牧)’에 대한 설명을 위의 기록처럼 적어놓고 있다.

 

그런데 사실 <세종실록지리지>의 제주목 내용은 세종 생전에 만들어진 <고려사>의 내용을 그대로 베껴놓은 것이다. 세종 31년(1449)에 제작된 <고려사>의 ‘탐라현’ 부분에 앞서 쓴 내용이 그대로 들어가 있다.

 

어쨌거나 위 기록에서 읽을 수 있는 건 성씨별로 살 곳을 구분했다는 점이다. 현재 일도·이도·삼도가 지금의 제주 시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그건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우리가 지금 만나는 길은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와 인연을 맺고 있다. 1910년 우리나라를 강제로 빼앗은 일본은 대대적인 토지조사를 진행한다. 제주역시 마찬가지였다. 제주에서의 첫 결과물은 1913년 나온다. 가장 오랜 지적도는 1913년 기록이다. 일본은 이를 토대로 지역간 간선도로망을 구축하게 된다. 제주도의 주동맥이 되는 일주도로는 1914년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은 해안 마을마다 일정구간을 정해 도민들을 동원, 길을 정기적으로 보수하곤 했다.

 

# 일제강점기 때도 살아 있는 마을 이름

 

1913년 지적도를 보면 관덕정 앞은 다른 곳과 달리 넓은 도로망을 갖추고 있다. ‘관덕정 광장’이라고 불릴 정도의 규모를 지니고 있다. 제주성 남문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한짓골을 지나면 관덕정 광장을 만나게 된다.

일제강점기인 1943년 제작된 제주도 지도. 빨간 테두리가 관덕정 광장이며, 파란색은 당시 큰 도로의 하나였던 한짓골이다. ©국토지리정보원
한짓골 북쪽에서 바라본 '한짓골 삼각지'. ©미디어제주

주목하고 싶은 건 한짓골이 일도동·이도동·삼도동을 가르는 중심이라는 점이다. 1913년 당시에도 그게 유효했던 것 같다. 1913년 지적도에도 일도·이도·삼도동이 등장하며, 소화 18년(1943) 지도에서도 볼 수 있다.

 

한짓골은 그래서 중요하다. 개발의 의미를 포함한 ‘삼각지’는 아니지만, 이곳저곳을 연결한다는 의미에서 한짓골은 삼각지였던 셈이다.

 

삼각지 한짓골은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도1동·이도1동·삼도2동을 가르는 지점이 한짓골에 있다. 한짓골 삼각점의 축은 예전 소라다방이 있던 건물이다. 그 건물을 축으로 동쪽으로는 일도1동이 되고, 건물 서쪽은 삼도2동이다. 옛 소라다방을 포함한 남쪽은 이도1동이다.

 

하지만 여기를 들르면 일도·이도·삼도동과 관련된 이야기나 지역을 나누고 있다는 어떠한 구분도 없다.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는 잃어버린 사랑에 한숨짓는 한 사나이를 얘기하는데, 한짓골 삼각지는 잃어버린 일도·이도·삼도를 생각하게 만든다. 길 위에는 이야기가 있고, 또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곳이어야 하는데 말이다.

 

파란 원은 '한짓골 삼각지'다. 일도1동과 이도1동, 삼도2동을 가르는 곳이다. 한짓골은 숫자 1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길을 말한다. ©미디어제주

 

# 한짓골 이야기 풀어내야 할 때

 

세 지역은 1·2동으로 나눠지기 전에는 일도리·이도리·삼도리였다. 1951년 인구 통계를 보면 일도리는 1만179명, 이도리 7472명, 삼도리 1만2264명이다. 인구만으로도 세 지역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충분히 알게 된다.

 

그러다 원도심은 핵의 중심에서 이탈하며, 현재의 위치에 오게 됐지만 역설적이게도 한짓골의 삼각지와 같은 이야기를 많이 남겨놓게 됐다. 한짓골은 현재 중앙로가 개통되기 전에는 가장 큰 도로였고, 핵심이었다. 하지만 도시계획을 바라보는 이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고 나서 제주에 첫 도시계획이 설정되는 건 1952년이다. 그 때 가로망 정비계획 이유서를 들여다보면 옛 것은 무조건 배격하려는 인상이 짙다. 제주시의 가로를 표현하는데 “난잡하다”는 게 들어 있다. 또한 “협소하다”는 것도 보인다. 정리를 하자면 도로가 구불구불하고 좁아서 불편하다는 걸로 요약된다. 1952년에 만들어진 도시계획 이유서는 지금도 도시계획을 하는 표본처럼 보인다. 왜냐, 개발 당사자들은 구불구불한 길보다는 곧게 뻗은 길을, 넓은 길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 있는 원도심에 그런 잣대를 댄다면 어떻게 될까. 도시재생을 할 이유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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