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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70주년 앞두고 3.1 발포사건 재조명 작업 활발
제주 4.3 70주년 앞두고 3.1 발포사건 재조명 작업 활발
  • 홍석준 기자
  • 승인 2017.09.22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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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연구소, ‘제주 3.1사건과 1947년 동아시아’ 국제학술대회 개최
미 군정의 개입, 3.1사건 주도세력에 대한 발표와 열띤 토론 이어져
‘제주 3.1사건과 1947년 동아시아’를 주제로 한 제주 3.1사건 제7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가 22일 오후 제주시 아스타호텔에서 열렸다. ⓒ 미디어제주

 

내년 제주4.3 70주년을 앞두고 4.3의 도화선이 됐던 1947년 3.1절 기념대회에서의 발포 사건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사)제주4.3연구소가 ‘제주 3.1사건과 1947년 동아시아’를 주제로 한 제주 3.1사건 제7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를 마련한 것도 바로 이같은 맥락에서다.

 

22일 오후 1시30분부터 제주시 아스타호텔에서 열린 이날 학술대회는 제1부 ‘동아시아의 1947년’과 제2부 ‘제주3.1사건, 그리고 한국사회’로 나눠 진행됐다.

 

허호준 한겨레신문 기자 ⓒ 미디어제주

가장 먼저 주제발표에 나선 허호준 한겨레신문 기자는 ‘1947년 냉전체제의 형성과 제주도’를 통해 우선 1947년 3월 발표된 트루먼 독트린이 외부 압력이나 무장세력의 봉기가 있는 경우 어느 곳이든지 개입할 논리적 근거가 됐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 트루먼 독트린 발표 이후 미 군정이 반공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는 정당성과 명분을 동시에 갖게 됐고, 이 반공정책이 제주 4.3에 대한 강력한 탄압으로 이어지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4.3 발발 이후 제9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의 평화협상도 미 군정의 의도에 따라 추진됐다면서 “미 군정은 하지와 딘의 지시에 따라 무장대 접촉을 시도했고, 평화협상은 무장대를 설득해 하산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공산주의자 제거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 허호준 기자 “브라운 대령의 제주 작전 지휘, 미국의 개입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

 

‘제주 3.1사건과 1947년 동아시아’를 주제로 한 제주 3.1사건 제7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가 22일 오후 제주시 아스타호텔에서 열렸다. ⓒ 미디어제주

 

5.10선거가 무산된 후 제주도 수석민정관의 요청에 따라 미군 구축함 크레이그호가 제주에 파견된 점, 1948년 5월 중순 제주도 최고 지휘관으로 파견된 미 보병 제6사단 제20연대장 로스웰 브라운 대령이 경비대와 경찰 등 제주도의 모든 작전을 지휘한 것을 두고 “그의 제주도 현지 파견과 공개적인 지휘는 제주4.3의 전개과정에서 미국의 직접 개입을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그는 주민 6명이 희생된 3.1사건 이후 남한 최초의 3.10 민관 총파업이 벌어졌을 때도 미 군정이 3.1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에서 정당방위였다는 경찰과 보조를 맞추면서 도민들의 분노와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했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오히려 총파업을 빌미로 미 군정은 이를 남한 파업의 시발점이 된 것으로 인식, 제주도민의 대다수가 좌익이라거나 제주도를 좌익 거점으로 보고 ‘공산주의자들의 거점’인 제주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인식했다는 것이다.

 

지정토론에 나선 박찬식 제주학연구센터장도 “그리스 내전 결과 1947년 3월 12일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됨으로써 국제적 냉전이 시작됐고 그 파고가 동북아시아 한반도 남단의 제주섬에까지 넘어왔다”면서 “UP 통신원의 눈에도 4.3은 그리스 내전의 복사판이었다”고 말했다.

 

또 그는 “70년 전 하루 간격으로 동북아시아의 대만과 제주 두 섬에서 일어난 사건은 섬 주민들이 대륙의 통치력과 탄압에 저항해 봉기했다가 집단 희생됐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한 역사성을 갖고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 양정심 교수 “1947년 3월의 제주도민, 당당하게 역사를 대면한 존재들”

 

‘제주 3.1사건과 1947년 동아시아’를 주제로 한 제주 3.1사건 제7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가 22일 오후 제주시 아스타호텔에서 열렸다. ⓒ 미디어제주

 

제2부에서 ‘1947년 제주3.1기념대회 주도세력에 대한 소고’를 발표한 양정심 성균관대 교수는 3.1 기념대회와 총파업을 주도한 세력이 남로당 제주도당을 비롯한 좌익세력들이었다는 점을 적시했다.

 

이에 대해 그는 “3.1 대회와 3.10 총파업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하지만 그것을 주도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드러나지 않았으면 하는 부분도 있다”면서 “그들과 그 조직이 4.3 봉기의 주도세력이 되고 있기 때문에 당시에는 그토록 도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던 그들이 4.3 학살의 광풍 속에서 금기 대상이 됐다”고 여전히 이 문제에 대한 접근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양정심 성균관대 겸임교수 ⓒ 미디어제주

그는 3.1 대회 당시 남로당 제주도당과 민전 위원장이었던 안세훈과 남로당 제주읍당책이었던 강규찬과 부녀부장 고진희 부부, 총파업을 처음 건의했던 대정면당의 김달삼(본명 이승진) 등의 사례를 들어 “3.1 대회의 핵심인물이었고 4.3 봉기를 주도한 이들을 포함한 좌익세력에 대한 평가는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지 모른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하지만 그는 이 대목에서 “그들만이 남로당과 민전의 전부가 아니다. 거기에는 평범한 하급 당원이, 평범한 마을 청년이, 평범한 제주도민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 속에서 그들과 같이 한 시간들이 존재한다”면서 좀 더 나은 세상, 가난한 사람들이 조금은 잘 살 수 있는 세상, 그리고 진정한 독립의 세상에 대한 일반 대중의 열망이 함께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제주도민이, 혹은 다른 지역의 평범한 사람들이 그냥 이끌리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였을까. 최소한 해방 정국, 1947년 3월에 제주도민은 그렇게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당당하게 역사를 대면하는 존재들이었다”면서 1947년 3월 당시의 시간 속에서 그 시대를 바라보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묵직한 주제를 던졌다.

 

한편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김상숙 단국대 교수의 ‘10월 항쟁에서 4월 항쟁으로’, 노영기 조선대 교수의 ‘제주 3.1발포사건 전후 광주‧전남 지역의 정치사회 변동 시론’ 발표를 통해 1947년 3.1 사건을 전후한 당시 대구와 전남 지역에서 벌어진 일들을 되짚어보면서 제주에서의 3.1 발포사건을 당시 주변 정세와 연계시켜 살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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