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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과거의 흔적'에 눈시울, "너무 변했어"
사라진 '과거의 흔적'에 눈시울, "너무 변했어"
  • 김두영 기자
  • 승인 2010.11.07 11:0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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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취재] ① 광주형무소 수형 4.3희생자 학살터를 가다

포근한 가을 햇살이 비추어진 11월 6일.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공동대표 김평담, 김용범, 윤춘광, 양동윤, 이하 4.3도민연대)는 6일부터 7일까지 1박 2일 일정으로 200여명의 4.3관련자들이 수감됐던 광주형무소터와 광주시내 곳곳의 4.3수형자 학살터를 돌아보는 '완전한 4.3해결을 위한 2010 전국4.3유적지 순례'를 실시했다.

이번 순례는 2000년부터 10년간 진행돼 온 4.3순례의 마지막 순서다.

순례에는 4.3도민연대 회원들을 비롯해 광주형무소 수형 희생자의 유족들이 함께 했다.

4.3당시 수형희생자들이 복역했던 광주형무소 터와 4.3수형자들이 희생된 학살터를 돌아보고 그들의 원혼을 위로하는 내용으로 진행됐다.

1948년 4.3 당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체포돼 광주형무소에 수감된 제주도민은 약 200여명.

이들 중 재판결과에 항소해 대구형무소로 이감된 2명과 1년 미만의 형을 선고 받았던 석방자들 외에는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

순례 참가자들은 이들이 억울한 수감생활을 했던 광주형무소 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 시간의 흐름속에 사라져 간 광주형무소

4.3도민연대에 따르면 당시 광주형무소의 4.3관련 재소자들은 주로 1948년부터 1950년까지 광주지방법원에서 치러진 4.3관련 재판을 통해 징역형을 언도받은 수형인들로 군법회의 수형인들이 수감됐던 다른 지역의 형무소와는 달리 일반재판 수형인들이 수감됐다.

광주형무소에 수감됐던 4.3관련 수형인들의 흔적은 각종 증언과 희생자 신고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으며, 국가기록원에 보관 중이던 4.3관련 일반재판 판결문을 통해 당시 광주지법 재판에 회부됐던 4.3관련자 200여명의 인적사항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주형무소에 수감됐던 4.3관련 수형인들의 대부분은 한국전쟁 발발 당시 광주지역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하기 직전 퇴각하던 헌병들에 의해 광주 각지에서 학살돼 행방불명 처리된 것으로 보이며, 4.3도민연대에서는 이에 대한 정확한 진상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6일 오전 11시 순례단이 방문한 광주형무소터에는 당시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당시 광주형무소의 정문이 있던 자리에는 갤러리와 주택 등이 들어서 있었고, 광주형무소의 경계가 됐던 동계천도 복계공사에 의해 건물들로 가려져 버렸다.

그나마 당시 광주형무소의 담장이 있었던 곳에는 난간이 설치돼 있어 당시 광주형무소가 있었던 위치에 대해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시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옛 광주형무소 터에서 광주 4.3수형인 유족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라져가는 아픈 역사의 현장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옛 광주형무소 터를 돌아본 4.3도민연대와 광주4.3수형인 유족들은 한국전쟁 발발 당시 수형인들이 집단학살됐던 지산면 장구봉과 극락면 불공고개로 발길을 돌렸다.

#. "언젠가 유해라도 찾을 수 있을까 했는데..."

지산면 장구봉과 극락면 불공고개는 한국전쟁 발발당시 가장 많은 수형인들이 집단 학살된 장소로 당시 인근에 거주하던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정확한 학살장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곳에도 주택가가 형성돼 당시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4.3도민연대에 따르면, 본래 야산이었던 이곳은 1979년을 전후해 본촌산단 조성공사가 진행되면서 산단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집단 이주를 하며 마을이 형성됐다고 한다.

당시 주민들은 이 곳이 학살현장임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다른 이주공간을 마련하지 못해 학살현장 위를 불도저로 밀고 그 자리에 각자 집을 지어 살게 됐다. 이에 따라 현재 조성된 마을 밑에는 아직도 많은 유골들이 잠들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학살터를 둘러본 4.3도면연대 회원들과 광주4.3수형자 유족들은 불공고개 학살현장 터인 운암한국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4.3수형자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진혼제를 가졌다. 특히 이날 진혼제는 광주4.3수형자 유족들이 진행했다.

광주4.3수형자 유족들은 제주에서 마련해온 과일과 음식들을 상에 올리고 억울하게 희생된 할아버지와 아버지, 형님들을 위한 제를 지냈다. 하지만 너무나 변해버린 광주형무소와 학살터의 모습에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날 4.3순례에 참가한 원계흥씨(73)는 "이번에 광주형무소와 학살터를 돌아본다고 해서 참가하게 됐지만 이렇게까지 변해있을 줄은 몰랐다. 내 눈으로 직접 보게되면 속이 시원해질 것 같았지만 오히려 더욱 답답해지는 것 같다"며 "차라리 이 주변이 개발되지 않았다면 유골을 발굴하고 감정을 통해 큰형님의 유골을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라며 안타까운 심경을 밝혔다.

당시 서귀포시 하원동에 거주하던 원씨의 큰형님은 1948년 8월 15일 무장대가 대동청년단 실천대장을 살해하는데 가담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돼 광주지방법원에서 7년형을 선고받고 광주형무소에 수감생활을 하다 한국전쟁 발발 후 행방불명됐다.

당시 10살이었던 원씨는 유해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되자 큰형님의 얼굴이 떠오르는 듯 말문을 열지 못했다.

아버지가 광주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다 행방불명된 강우춘씨(64)도 변해버린 학살터 현장에 눈시울을 붉혔다.

강씨는 "세월이 흐르면서 변해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당시 억울한 희생자들이 묻혀있는 현장이라도 그대로 보전했으면 안됐을까?"라면서 "이렇게 건물들이 들어서게 되면 앞으로도 유해를 찾을 수 없을텐데"라고 말했다.

당시 대동청년단에 편성돼 신엄지서 경비업무를 수행하던 강씨의 아버지는 강씨가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1948년) 지서에 불이 나자 방화범으로 오인받아 경찰에 연행된 후 광주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다 한국전쟁 발발 후 행방불명됐다.

아버지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강씨는 유해마저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고 말했다.

순례단은 진혼제를 올리며 희생자 영령들의 명복을 빌었다.

순례 이틀째인 7일에는 광주형무소 수형자 학살터인 대촌면 한톳재와 학동 밀양동고개, 석곡면 도봉고개와 국립 5.18묘지를 돌아봤다. <미디어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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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2011-01-30 16:3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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