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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 편의 힘, 그 진실 추구의 파장
영화 한 편의 힘, 그 진실 추구의 파장
  • 강성률
  • 승인 2012.07.11 16: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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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률 칼럼]<2> <두 개의 문>에 대한 단상

 

 

<두 개의 문>에 대해 더 이상 거론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미 이 영화에 대해 수많은 이들이 논한 마당에 새로운 의견이 나올 수 있을까? 쉽지 않아 보인다. 이 영화에 대해 이미 두 번의 글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다시 이 영화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왜 그런 것일까? 이 영화를 자꾸만 거론하는 것은 이 영화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현실 때문이다. 그러니까 영화 자체의 힘이 아니라(물론 영화 자체의 힘도 있지만) 이 영화를 만들게 한 (부정적인 의미의) 현실이나, 이 영화에 그려진 현실이 자꾸만 이 영화를 호명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꾸만 이 영화를 보고 또 보게 되고, 거론하고 또 거론하게 된다.

사실 <두 개의 문>을 그리 뛰어난 다큐라고 칭하기는 쉽지 않다. 이 다큐는 한번 보기에 적당한 다큐이지, 몇 번이나 음미하며 보기에 적당한 다큐는 아니다. 그만큼 스타일도 단순하고 내용도 깊지 않다. 좀 나쁘게 말하면 <두 개의 문>은 단순한 스타일로 우리의 현실을 단순하게 고발한다. 그런데 자꾸만 이 영화를 보게 되고, 영화를 볼 때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것이 바로 이 영화의 힘이다.

질문을 해 보자. 우리는 용산 참사에 대해 알고 있는가? 2009년 1월 20일에 발생한 그 사건에 대해 우리 모두는 알고 있지만, 정작 아무도 제대로 알지는 못한다. 그들은 왜 죽었는가? 6명이 죽은 그 사건을 재판을 해서 판결까지 내렸지만, 그들이 왜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죽은 이들은 진실을 말할 수 없고, 경찰은 진실을 은폐하고, 검찰은 그 은폐를 법으로 선포해 버려, 영원히 오리무중으로 그 사건은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사건인 용산 참사가 되어 버렸다.

이 영화가 고발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용산 참사를 다룬 다른 다큐가 주로 유가족의 힘든 싸움을 그리고 있다면, <두 개의 문>은 그 사건 속으로 정면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망루로 올라간 이들이 왜 죽어야 했고, 그나마 살아남은 이들은 왜 감옥에 가야 했는지, 그것이 얼마나 정당한지 의심의 눈초리로 묻고 또 묻는 것이다. 그런데 묻는 방법이 특이하면서도 참신하다. “이 다큐멘터리는 경찰 진술과 증거 동영상을 바탕으로 용산 참사와 재판과정을 재구성한 것이다”라는 기획 의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경찰의 자료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것이 말이 되는가?

그러나 재판에 드러난 경찰의 진술과 증거를 토대로 진실을 재구성하려는 전략은 무척 효과적이다. 무엇보다 실시간 별로 그날의 일을 재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경찰이 과잉 진압을 했고, 그 공포의 진압 속에서 농성자들이 어떻게 대응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렇게 믿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통해 관객들은 어떻게 이 사건이 발생했는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것도 이런 전략 때문이었다.

그러나 경찰의 진술과 증거를 토대로 현실을 재구성하는 시도는 어쩌면 무모해 보인다. 왜냐하면 경찰은 그들에게 불리한 진술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찰은 자료의 1/3을 (대법원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제출하지 않았고, 결정적인 자료도 모두 없다고 시치미를 떼었다. 그런데 여기서 기이한 현상이 발생한다. 그들이 자료를 제출하지 않고, 그들이 결정적인 증거가 삭제되었다고 하면 할수록 의혹은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경찰과 검찰이 어떤 말을 해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 이 엄청난 눈덩이 효과!

<두 개의 문>은 그 작업을 너무도 성실히 수행했다. 감독이 재판정에서 이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 이유가 있었다. <부러진 화살>의 김명호 교수가 말한 것처럼 “재판이 아니라 개판”인 현실을 강하게 고발한 것이다. 게다가 픽션의 극(劇) 영화가 아니라 현실을 재생한 다큐이기 때문에 더욱 강한 효과를 불러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확신은 보기 좋게 성공했다.

지금 <두 개의 문>이 전국 관객 3만 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독립 다큐가 3만 명을 돌파한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문제는 정작 이 영화를 봐야 할 이들은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다큐가 왜 이렇게까지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는지 알아야 할 이들은 바로 현 정권이다.

영화를 본 현 정권이 이 문제에 대해 반드시 답해야 한다. 그러나 정권은 끌까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영화 초반에 “법과 질서를 지키는 것이 떼를 쓰는 것보다 더 낫다”라고 말하는 MB가 등장한다. 이제 그 말을 그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프로필>
 영화평론가
 광운대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주간 <무비위크> 스태프 평론가
 서울국제초단편영화제 집행위원
 저서 <하길종 혹은 행진했던 영화바보> <친일영화>
 <영화는역사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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