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9 21:06 (금)
선진 도시디자인 흉내내면서,
'민주적 절차성'은 안 배웠나?
선진 도시디자인 흉내내면서,
'민주적 절차성'은 안 배웠나?
  • 윤철수 기자
  • 승인 2007.08.09 17: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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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논단] 제주시 '현수막 일제철거'의 자기모순

"일본 도쿄와 요코하마 두 도시에는 하나같이 플래카드, 즉 현수막을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 아취나 탑은 물론이다. 그 많은 인구가 살고 있다는 것이 실감이 안날만큼 한산하고 조용한 것이다."

얼마전 도시디자인 선진지인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온 고경실 제주시 부시장이 각 언론에 보낸 특별기고의 내용 중 하나다. 그는 선진도시 디자인의 사례를 설명하며, 일본의 두 도시에는 플래카드 하나 없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고경실 부시장의 이러한 취지를 살리려는 것일까. 지난 8월3일 제주시 옛 제주세무서 사거리에 위치한 민주노동당 건물 외벽에 내걸렸던 '김태환 지사 퇴진' 현수막이 사라졌다. 사정인 즉슨 지난 6월 현수막 철거를 요청했던 제주시 당국이 이 현수막을 강제철거시킨 것이다.

#동사무소 공무원, 자치경찰단까지 찾아가 현수막 철거명령

그리고 8월9일, 제주시 당국은 각 동사무소에 시달해 건물 외벽에 내걸린 현수막을 일제히 철거하도록 했다. 그리고 곧바로 동사무소 공무원들이 관할 건물 사무실을 찾아다니며 8월10일까지 현수막을 철거할 것을 요구했다.

자진해서 떼어내지 않으면 강제철거함은 물론 과태료를 부과하겠다는 엄포도 빼놓지 않았다. 이번에 제주시당국으로부터 엄포를 받은 대상 중에는 공공기관도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그중 제주특별자치도 자치경찰단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 공공기관도 조례를 어기며 불법 현수막을 부착했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제주시가 강제철거를 명령하는 법적 근거는 '옥외광고물 등 관리에 관한 조례'의 제15조 현수막 표시방법이다. 벽면의 현수막을 게시할 때에는 일반적인 규정이 자기 상호하고, 영업내용하고, 전화번호 등 일반적으로 표시하도록 규정돼 있다. 또 벽면 현수막의 경우 일정규모 이상의 대형건물 외에는 현수막을 내걸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대형건물이 아닌 일반 건물의 현수막은 모두 불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제주시당국의 이러한 행정행위는 두가지 '자기모순'을 갖고 있다.

#행정기관부터 '나쁜 짓' 해오다가 이제와서 '다같이 하지말자?'

하나는 행정의 일관성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건물 외벽의 현수막은 그동안 행정당국에서 강력히 제재를 가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일부 사안에 대해서는 행정이 현수막 게재를 독려한 적도 있었다.

실제 2005년 행정구조개편과 관련한 논란이 있었을 때, 건물 외벽에 단일광역행정체제의 지방자치체계가 이뤄진다는 점을 적은 현수막을 내건 것도 행정당국이었다. 일부 사회단체에서 내건 현수막 역시 행정당국의 묵시적 동의 내지 부추김을 받은 것들이었다.

또한 제주특별자치도가 출범했을 때, 특별자치도 출범 축하 현수막 역시 행정당국의 독려가 있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각 단체로 하여금 언론에 축하광고를 하도록 하고, 현수막을 내걸게 한 것도 행정당국이다. 세계자연유산 등재 축하 현수막 역시 마찬가지다.

공공기관인 자치경찰단이 현수막 불법게재로 이번 단속에 포착된 것은 행정기관이 그동안 얼마나 안일하게 행정집행을 해 왔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9일 행정당국으로부터 '수강생 모집' 현수막을 철거하도록 명령을 받은 한 학원의 관계자는 "지금까지 나쁜 짓은 행정에서 모두 해오다가, 민주노동당의 '김태환 퇴진' 현수막 강제철거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러는 것 아니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또다른 사무실 관계자는 "고경실 부시장이 최근 일본에 갔다오더니만 자신이 시찰한 도시에 현수막이 없는 점 등을 들며 행정을 일본 선진디자인 어쩌고 저쩌고 하며 현수막에 대해 '노이로제'를 보이더니만, 결국 행정집행에 있어 오버를 하고 있다"며 "이는 일괄성을 상실한 것으로, 행정월권이 지나치다"고 비난했다.

#현수막 표현문구 시비 걸었던 것은 '무지함' 때문이었나

이러한 행정의 일관성 상실은 그렇다 치더라도, 두번째 '표현의 자유'까지 침해하며 협박전화까지 일삼는 제주시 당국의 행태는 그야말로 '행정의 무지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처사다.

옥외광고물 업무를 담당하는 제주시 관련부서의 직원들은 지난 6월 현수막 제작업체에 전화를 걸어 "앞으로 '김태환 퇴진' 등의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제작하면 처벌받을 줄 알라"고 협박한 바 있다.

이는 이번 현수막 일제철거 명령이 단순히 '선진 도시디자인' 차원이 아니라,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강압적으로 차단시키려는 과거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행정발상에 다름없다.

어제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오늘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날 그날 기분에 따라 강압적 행정집행을 하려는 제주시 당국의 이번 '현수막 일제철거' 방침은 마땅히 재고돼야 한다. 행정집행의 정당성을 얻으려면 민주적 절차성부터 확보해야 할 것이다.

<윤철수 대표기자 / 미디어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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