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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에 익숙해지면 을의 고통은 모르게 되죠”
“갑질에 익숙해지면 을의 고통은 모르게 되죠”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8.01.26 12: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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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窓] 관행이 된 행정의 ‘갑질’에 대한 단상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관행이라는 건 참 무섭다. 특히 행정의 관행은 더 그렇다. 행정은 뭔가 새로운 걸 하기보다는 기존의 것을 따르는 게 순리라고 보는 경향이 짙다. 흔히 말하는 ‘보신주의’가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혹시 이 글을 읽는 공무원들은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을 해야 한다. 건축설계 과업지시서를 한 번 읽어본다면 항변을 할 공무원은 많지 않으리라 본다.

솔직히 말하면 건축설계와 관련된 과업지시서는 이해하지 못할 문구 투성이다. ‘갑질’이며, ‘을의 눈물’이다.

사업을 하다보면 시행착오도 많이 있을 수 있다. 액수를 부풀리는 경우도 있고, 공사비가 턱없이 높아지는 경우도 있다. 이럴 경우 어떻게 하면 될까. 액수를 부풀린 경우는 환수를 하고, 과다계상한 사람을 혼쭐 내주면 된다.

제주도의 건축 설계 과업지시서. 관행처럼 갑질을 저지르고 있다. 미디어제주
제주도의 건축 설계 과업지시서. 관행처럼 갑질을 저지르고 있다. ⓒ미디어제주

그런데 발주자의 사정으로 설계를 다시 해야 할 경우는 누구 책임인가. 설계를 한 사람이 책임을 질까? 그게 맞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게다. 응당 발주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제주도의 과업지시서는 이런 경우 설계 용역을 맡은 건축사사무소가 모든 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다. 엊그제 기사를 쓰기는 했으나 다시 한 번 과업지시서를 읊어보면 “성과품에 대한 보완 및 추가 수록 등이 필요한 사항에 대하여는 수급인 부담으로 즉시 보완해야 한다”고 돼 있다. 이게 갑질이다.

설계는 쉬운 과정이 아니다. 밤샘은 밤 먹듯이 한다. 건축사 혹은 건축가라고 불리는 이들은 학창시절 공부를 꽤나 했다. 요즘은 학부과정도 다른 대학에 비해 길어졌다. 대학 졸업 후에는 건축사사무소에서 5년간 실무경험을 쌓지 않으면 안된다. 그 다음에 건축사 자격시험을 치를 수 있다. 그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면허를 딴 순간, 행정의 갑질에 놀아나는 ‘영원한을’이 되고 만다.

행정의 과업지시서는 행정이 일방적으로 사업을 중단하더라도 용역을 맡은 설계사무소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그렇다면 행정은 왜 ‘갑질’에 해당하는 과업지시서를 만들까. 앞서 얘기했듯이 관행이다. 제주도청의 계약부서는 “준칙은 없다”고 하지만, 관행처럼 여겨진 과업지시서를 그대로 인용해오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진 못할 것이다.

과업지시서를 그대로 인용하는 관행은 의식이 없는 상태나 다름없다. 아무 의식도 없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무조건반사나 마찬가지이다. 잘못된 관행은 깨는 게 맞다. 이젠 관행이 된 갑질을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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