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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성은 왜구 침입 이후에 지금 규모로 커져
제주성은 왜구 침입 이후에 지금 규모로 커져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8.08.13 13: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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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제주 이야기 <6> 제주성

적으로부터 효과적으로 방어를 하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개개인을 따진다면 갑옷 등으로 무장하는 게 하나의 방법일테다. 하지만 그런 무장은 쉽지 않다. 시계를 옛날로 돌려본다면 갑옷으로 무장을 하는 계층은 한정적이었다. 그런 계층에 들지 못한 이들은 화살받이가 되곤 했다. 그게 싫으면 도망이 상책이다.

그건 그렇고, 다중이 적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려면 뭐가 필요할까. 이름하야 ‘성곽’이 그런 방어막이 된다. 특히 우리나라의 성곽은 유럽이나 일본과 달리 규모가 컸다. 유럽과 일본의 성곽은 성주 위주의 성이었지만 우리나라는 마을 단위의 성곽이었다. 그걸 읍성이라고 부른다.

제주는 조선시대 세 고을을 뒀고, 각각의 읍성이 존재했다. 조선시대는 분명 세 곳의 읍성이 존재를 했는데, 그 이전은 어땠을까. 제주목·대정현·정의현 세 곳 가운데 제주목에 있는 성곽만 살펴보자. 제주목을 에워싸고 있는 성곽을 제주성이라고 부른다. 현재 남아 있는 구간은 길지 않다. 대부분은 허물어졌다.

제주성의 원 모습을 찾으려면 탐라국 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이어지는 긴 역사를 지닌 게 제주성이다. 제주성이 기념물로 지정된 건 1971년이다. 현재 오현단 남쪽에 있는 곳만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제주성은 육지부에 남아 있는 읍성과 비교해도 큰 편이다. 성곽 흔적을 쫓아가면 둘레가 3.2km나 된다.

현재 제주성은 이같은 모습이지만 언제 축조됐는지는 알 수 없다. 탐라국 시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만 된다. 조선초기 기록물인 <동국여지승람>을 들여다보면 제주목 옛터를 소개하는 항목 가운데 ‘고성(古城)’이 보인다. 고성은 옛 성이라는 말인데 “성 서북쪽에 고성의 터가 있다”고 나온다. 그렇게 따지면 현재 관덕정을 중심으로 서북쪽 일대를 말하는 걸 알 수 있다. 지금은 무근성이라고 부르는 지역이다. 무근성은 말 그대로 ‘묵었다’는, 즉 오래된 성이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제주성에 대한 첫 축조 기록은 찾지 못하지만 시기를 조선시대로 한정시켜보자. 조선시대에 ‘제주성’이라는 단어가 처음 나타나는 시기는 태종 때이다. <태종실록> 태종 8년(1408)에 등장한다.

“제주에 큰비가 내려 물이 제주성에 들어와 관아와 민가가 물에 잠기고, 곡식 절반이 침수됐다”는 내용이다. 태종 때는 근근이 이어오던 탐라가 완전 조선에 편입된 시기이다. 제주도는 조선 건국 이후에도 어느 정도 독립적인 지위를 이어오고 있었으나 1402년부터 지위가 바뀐다. 당시 성주였던 고봉례와 왕자였던 문충세가 조정에 들어가 자신들의 칭호가 분수에 넘친다면서 고쳐주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성주는 탐라 최고의 지도자였고, 왕자는 성주 바로 아래 직위였기에 그 직위를 내놓는다는 건 탐라체제의 종말을 의미하는 사건이다.

‘제주성’이 <태종실록>에 처음으로 등장한 때는 탐라가 조선에 완전 편입되고 나서다. 이후 제주성을 수축하라는 내용도 등장한다. 제주성을 수축하라는 지시에 대한 기록은 태종 11년(1411)에 확인할 수 있다.

오현단에서 바라본 제주성. 미디어제주
오현단에서 바라본 제주성. ⓒ미디어제주

그래서일까. 제주성은 해를 거듭할수록 규모가 커진다.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둘레는 910보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엔 둘레 4394척, 높이는 11척으로 나온다. 척과 보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는데, 현재 기준으로 따지면 둘레는 2km가 채 되지 않는다.

제주성이 눈에 띄게 커지는 건 명종 21년(1566) 이후가 된다. 이유는 을묘왜변이라는 사건의 영향이 컸다. 을묘왜변은 1555년 발발한다. 그해 5월 전남 일대에 침입을 했던 왜구들이 한달 후에 제주를 다시 침략한다. 제주에 침입한 사건을 2차 을묘왜변이라 부르며, 왜구들이 제주성을 3일간 포위를 하게 됐다. 이때 목사였던 김수문이 왜구를 물리쳐서 승진까지 하게 됐다고 한다. 을묘왜변 10년 후에 제주목사로 온 곽흘 목사는 왜구의 침입을 걱정했는지, 제주성을 더 늘리게 된다.

곽흘 목사 이전의 제주성은 동쪽으로는 산지천, 서쪽으로는 병문천을 사이에 두고 존재했다. 두 개의 하천 사이에 성이 존재했다는 건 하천을 천연적인 해자로 활용했다는 의미도 된다. 그러나 을묘왜변 등의 사건을 거치면서 동쪽으로 더 확장되는데, 성에 포함되지 않았던 산지천, 즉 제주성 동쪽 밖에 있던 산지천이 제주성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산지천과 아울러 물이 많이 나오는 가락천도 성안에 포함된다.

곽흘 제주목사는 산지천과 가락천을 성안으로 들여놓은 뒤 다음처럼 설명한다. “만약 성이 포위되는 변란이 있게 되면 병사들의 목마름을 장차 어떻게 구원하나.”

제주성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한차례 더 이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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