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9 16:48 (금)
“김만덕이 객주업으로 부자가 된 게 맞나요?”
“김만덕이 객주업으로 부자가 된 게 맞나요?”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8.11.26 10: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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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제주 이야기 <9> 김만덕2

1970년대에 ‘주막 겸한 객주업 시작한 듯’ 추론 등장
만덕 생전 제주도는 상업활동 약했기에 객주업 의문
기녀 활동으로 돈을 벌었다는 기록은 취급받지 못해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김만덕은 기부를 얘기할 때 늘 등장을 하는 인물이다. 그 배경엔 막대한 돈을 모은 재력이 뒷받침돼 있다. 대단한 인물임은 분명하다. 기녀의 신분으로 돈을 모았고, 그 돈을 굶주림에 허덕이던 제주도민을 위해 썼으니 추앙을 받아야 하는 인물임엔 더 얘기할 필요가 없다.

김만덕은 객주업을 하면서 돈을 벌었다고 한다. 이게 하나의 통설이다. 문제는 ‘과연 그런가’에 있다.

객주는 상인의 물건을 팔아주고 매매를 하는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을 말한다. 객주는 또한 숙박도 겸한다. 김만덕도 그런 객주업을 하면서 제주에 오가며 장사를 하는 상인들의 물건을 사주고 또한 물건을 팔고 했다는 게 통설의 요지이다. 아울러 객주업을 하던 김만덕은 숙박도 겸하고 술도 팔면서 돈을 모았다고 한다. 그런 통설이 과연 맞을까. 여기에 의문이 남는다.

역사는 기록으로 말한다.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으면 좋겠지만 김만덕이 객주업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김만덕이 살던 당시의 기록에 객주업을 했다는 내용만 있더라면 의문의 여지는 없을텐데, 그게 아니라는 게 문제이다.

제주시 산지천변에 있는 김만덕기념관.
제주시 산지천변에 있는 김만덕기념관.

김만덕이 객주업을 했다는 기록은 20세기에 와서야 등장한다. 그것도 1970년대 기록이다. 김만덕은 18세기와 19세기를 살던 인물인데, 그가 죽은 지 150년이 지나서야 객주업을 했다는 기록이 등장한 걸 “맞다”고 봐야 할까. 어쨌든 1970년에 등장한 그 기록으로 인해 김만덕은 객주업으로 돈을 벌었다는 게 정설이 된다. ‘객주업’을 만들어낸 그 책자는 “주막을 겸한 객주업을 시작한 듯하다”고 돼 있다. 객주업을 했다는 것도 아니고, 객주업을 한 것 같다는 추론이다. 그게 이젠 “김만덕은 객주업을 했고, 객주업으로 돈을 벌었다”고 정설이 된 셈이다.

제주시 건입동엔 ‘김만덕 객주’라는 간판도 등장해 있다. 예전 김만덕 활동을 재현한다고 해뒀으나 여기를 오가는 사람들은 김만덕이 객주업을 했다는 사실을 정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만일 김만덕이 객주업을 했다고 하더라도 장소도 문제가 된다. 객주업을 하려면 상업이 활발하거나, 배가 자주 오가야 하는 포구여야 하는데 ‘김만덕 객주’를 재현한 곳은 그것과는 거리가 있다.

18세기 당시는 제주도 사람들은 육지부로 오가지 못하는 출륙금지령 상태였다. 따라서 제주와 육지부를 오가는 포구도 제한적이었다. 육지부를 오가던 대표적인 포구로는 화북포와 조천포가 있었다. 이들 지역으로 유배인들이 오갔고, 관료들도 이동을 했다. 김만덕 객주를 재현한 곳은 건입동으로, 예전엔 산지포였으나 18세기엔 그런 용도로 쓰였다고 보기 힘들다.

또한 객주업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상인이 있어야 하고, 주변엔 시장도 활성화돼야 한다. 제주도는 그러질 못했다. 상인들이 거래하는 시장은 아주 먼 얘기였다.

1840년대의 기록을 보자. 제주목사로 와 있던 이원조가 남긴 <탐라지초본>을 보자. 여기엔 “읍에는 장시가 없고, 재화는 돈을 사용하지 않고 포목만 사용하므로 매매가 매우 어렵다”고 나온다. 당시 제주도는 상업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없었고, 상업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건 출륙금지령이 풀리면서부터이다.

김만덕이 객주업으로 돈을 벌지 않았다면 대체 뭘로 돈을 벌었을까. 김만덕은 기녀 신분이었다. 아무래도 기녀 활동으로 돈을 벌었다고 볼 수 있다. 제주목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제주에 4개월 기거하던 심노숭이라는 학자가 있다. 심노숭은 만덕과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심노숭은 기록을 남기는데 철두철미한 학자로 유명하다. 그가 직접 만덕을 만났는지, 만덕의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기록을 남기기에 좋아하는 심노숭은 만덕의 이야기도 빼놓지 않고 있다. 그가 남긴 만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만덕이 기녀활동으로 돈을 벌었다고 나온다. 다만 그의 기록은 정설로는 취급받지 못하고 있다.

“만덕은 품성이 음흉하고 인색해 돈을 보고 따랐다가 돈이 다하면 떠났는데, 그 남자가 입은 바지저고리까지 빼앗았으니 이렇게 해서 가지고 있는 바지저고리가 수백 벌이 됐다. 매번 늘어놓고 말리니 다른 기녀들조차 침을 뱉고 욕했다. 패가망신하는 이들이 잇따랐고 그래서 그는 제주 최고의 부자가 됐다.”

김만덕은 나눔의 대명사이다. 그가 살아온 시대와 지금은 다르다. 지금의 잣대로 옛날을 바라볼 필요는 없다. 그가 뭘로 돈을 벌어서 나눔을 실천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기녀로 돈을 벌었다고 해서 부끄러울 게 뭐가 있나. 그렇게 어렵게 돈을 벌어서 나눔을 실천한 역사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어쨌든 역사는 거짓으로 쓸 수는 없다. 객주업으로 돈을 벌었는지, 기녀 신분으로 돈을 벌었는지는 역사적 관점에서 제대로 고찰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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