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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쫓는 사람들’ 제주4.3 숨겨진 미군의 진짜 모습
‘진실을 쫓는 사람들’ 제주4.3 숨겨진 미군의 진짜 모습
  • 제주도인터넷신문기자협회
  • 승인 2021.03.30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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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인터넷신문기자협회 공동기획]
② 미군정 4.3책임 규명을 위한 학술연구의 현주소
코로나19 美 자료수집 난항...연구인력 확보도 과제

제주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 지 21년 만에 전부 개정이 이뤄지고, 최근 3년간 불법 군사재판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수형인들이 재심에서 연이어 무죄 또는 공소기각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완전한 해결’을 향해 이제야 단 몇 걸음을 내디뎠을 뿐이다. 4·3 과제를 완성하기 위해선 70여 년 전 제주도를 비극으로 몰아넣은 주체에 대해 책임을 묻고 규명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당시 남한 지역을 통치했던 미군정이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통일을 외치던 시민들을 강경하게 탄압하며 제주를 대학살의 현장으로 이끈 사실이 여러 보고서와 증언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책임을 밝히고 이에 대한 후속조치를 요구하는 작업은 아직 미진한 상황. 제주도인터넷신문기자협회(미디어제주·제이누리·제주의소리·제주투데이·헤드라인제주)는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5차례의 공동 기획보도를 통해 4·3 당시 미군정의 책임에 대한 진단부터 이를 규명하기 위한 학술운동, 대중운동의 성과와 과제를 진단해 본다. <편집자주>

1948년 10월17일 당시 제9연대장이었던 송요찬 소령의 포고문 발표로 제주에서는 4.3과 관련한 대대적인 강경 진압이 전개됐다. 이른바 초토화 작전의 시작이었다.

송요찬 소령은 주한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William L. Roberts) 준장의 추천을 받은 인물이다.

당시 미군은 정보보고서를 통해 “제9연대는 중산간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고 명시했다.

그 시절 이승만 정부는 제주4.3 진압을 통한 미국 차원의 원조 지원을 계획하고 있었다. 소련과의 냉전 속에서 공산주의 확대를 막기 위한 미국의 강경책이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였다.

제주4.3단체와 유족들은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이자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른바 초토화작전이 미국과의 깊은 교감 속에 진행됐다고 의심하고 있다.

의심은 진상규명으로 이어졌다. 1980년대 민간에서 시작된 4.3진상규명은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의 제정으로 꽃을 피웠다.

2003년 10월에는 노무현 정부에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됐다. 그해 10월31일 제주를 찾은 故 노무현 대통령은 과거 잘못된 국가공권력 행사에 공식 사과하며 머리를 숙였다.

그동안 4.3에 대한 연구는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에 초점이 맞춰졌다. 제주4.3연구소와 학계 등에서 미국 책임에 대한 연구가 개별적으로 이뤄졌지만 여론 확산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2018년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냉전시대 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활동도 힘을 받기 시작했다.

민간에서는 2003년부터 외국 학술행사를 통해 미국의 책임을 의제화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됐다. 2013년에는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영문판이 발간되면서 국제화에 힘을 보탰다.

학계와 민간단체의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활동에는 한계가 있었다. 조사의 시작인 미국 내 방대한 역사적 자료 수집부터 난관이었다. 국제적 네트워크 구축 등 넘어야 할 산도 많았다.

2018년 10월 제주4.3평화재단 내 연구조직인 ‘조사연구실’이 신설되면서 연구에 힘이 실렸다. 제주4.3 논문 1호 박사인 양정심 전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연구교수가 조사팀을 이끌었다.

조사팀은 올해초 4.3평화재단 미국자료 조사사업의 첫 번째 성과물로 ‘제주4.3사건 추가진상조사자료집 미국자료1,2’를 선보였다. 본격적인 미국자료집 편찬은 2003년 이후 18년만이다.

4.3평화재단은 2019년부터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조사팀을 보내 미군정청(USAMGIK), 미군사고문단(KMAG), 극동군사령부(FEC), 연합군사령부(SCAP)의 문서를 확보했다.

이들 기관에서 생산한 문서만 3만8500매를 넘었다. 조사팀은 6개월간 제주4.3과 연관이 있는 자료 4200매를 추려 번역에 들어갔다. 이를 토대로 총 1190매 분량의 자료집을 만들었다.

공개된 자료를 통해 4.3 전후 한반도와 제주 상황을 바라보던 미군정청과 군사고문단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을 둘러싼 국제정세와 국내 상황도 짐작할 수 있다.

1947년 8월20일 웨드마이어(Albert C. Wedemeyer) 중장이 이끄는 본국 특사단과 주한미육군사령관 존 하지(John Reed Hodge) 중장의 장문의 대화록이 대표적인 자료 발굴 사례다.

1948년 3월 12일 서울서 열리는 도지사·경찰청장 합동회의를 앞두고 존 하지 중장이 낸 성명서. /사진=제주4.3사건 추가진상조사자료집 미국자료
1948년 3월 12일 서울서 열리는 도지사·경찰청장 합동회의를 앞두고 존 하지 중장이 낸 성명서. /사진=제주4.3사건 추가진상조사자료집 미국자료

하지 중장은 당시 대화에서 “우리는 점령에 대해 아무런 준비도 없이 들어왔다. 미군 장교가 일본이 항복하기 며칠 전, 단순히 지도를 보고 획정한 조선의 38선 분할은 납득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4.3의 도화선이 된 1947년 3.1 제주발포사건에 대해 주한미군 정보참모부는 “1947년 3월1일 오전 10시, 좌파로 추정되는 폭도가 경찰 건물을 공격했다”며 왜곡 보고하는 내용도 확인할 수 있다.

4.3평화재단은 미군정의 책임을 객관화 할 수 있는 추가 조사를 추진하고 있지만 코로나19 사태에 발목이 잡혔다. 미군정의 책임을 입증할 현지 문서 확보가 중단됐기 때문이다.

양정심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은 “아직도 확인해야 할 미국 자료들이 많다. 무수히 많은 자료 중에서 제주와 관련된 진실을 찾아내는 작업이 이번 조사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이어 “코로나19 사태로 자료 수집을 위한 현지조사를 재개하지 못하고 있다”며 “4.3당시 미군정의 상위기관에 이어 보고 체계에 따른 기관 등의 자료를 추가로 확보해야 한다”고 밝혔다.

양 실장은 “추가 진상조사가 계속돼야 하지만 조사와 연구를 이끌어갈 다음 세대 전문가가 부족하다. 미군정의 책임 규명 등 진실을 위해서라도 인력양성을 위한 노력도 뒤따라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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