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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강상룡의 딸, 강순자' 소리 듣기가 소원이우다"
"'아버지 강상룡의 딸, 강순자' 소리 듣기가 소원이우다"
  • 김은애 기자
  • 승인 2021.11.04 15: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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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4. 스무 번째 제주4.3증언본풀이 마당 열려
제주4.3으로 가족 잃고, 호적도 잃은 3명 어르신 증언

"잃어버린 호적 찾아 내 뿌리 찾고파" 소송 진행 중
스무 번째 제주4.3 증언본풀이 마당 현장.

[미디어제주 김은애 기자]

“이제는 눈물도 안납니다. 악 밖에 안납니다. 4.3이 나를 울렸어요.” / 제주4.3 증언본풀이 마당 증언자, 강순자 씨(여, 1944년생, 애월 하귀)

11월 4일 제주4.3평화기념관 대강당에서 열린 제주4.3 증언본풀이 마당. 제주4.3의 비극이 닥친 후 스무 번째 열린 증언 시간이다.

이날의 첫 증언자는 강순자 씨. 강 씨의 고향은 애월이다. 애월에서 태어났고, 이곳에서 아버지를 잃었다.

스무 번째 제주4.3 증언본풀이 마당 현장.
증언자로 나선 강순자 씨(왼쪽)과 대담자로 나선 오화선 제주4.3연구소 자료실장.

강 씨가 여섯 살, 그의 아버지는 스물 여덟 살 되던 해다. 1948년 12월 28일, 애월읍 신엄리 자운당으로 불리는 밭에서 비극이 시작됐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그의 아버지가 총살당한 것이다.

“아버지는 구엄 위쪽에 자운당이라고, 움막허게 파진 밭에 가서 죽여 버렸습니다. 동짓날 스무레잇 날입니다. 제삿날 되면 하귀 군냉이에 집집마다 불이 켜져서 맹질같이 제사 지낸다고 했습니다. 아버지하고 8촌 형제되는 강제송 씨 하고 같이 돌아갔는데 그집 할아버지가 구루마로 끄서다 묻었습니다. 그 할아버지 이름은 강만석입니다.”

아버지가 갑자기 영문 모를 죽임을 당한 일, 그리고 옆집 할아버지가 그의 아들과 함께 강 씨 아버지의 몸을 옮겨 묻은 일. 강 씨는 그때의 정황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혼자 살젠 허난 서럽고 외롭고… 이제는 눈물도 안 납니다. 악 밖에 안 납니다. 4.3이 나를 울렸어요. 우리 집안 망하고 우리 집 문 닫고. 나이 들어서도 어머니 재가 한 집에 안 찾아다녀요. 그 집 궨당*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난 그런 눈치 싫습니다. 그러니 어머니한테는 빌어먹어도 안 갔어요.”

*궨당: 친척, 가까운 이웃 등을 일컫는 제주 방언.

아버지를 여읜 강 씨. 그의 어머니는 이듬해 재혼하게 된다. 어머니는 당시 아버지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아 법적으로 강 씨와 가족 관계가 아니었다. 어머니와 영영 남이 된 것이다.

“아버지가 3대 독자입니다. 가까운 친척이 없었습니다. 제일 가까운 친척이 8촌 형제 되는 분(강제송 씨)이고, 자식으로는 나 하나였습니다. 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세 살 때 죽었습니다. 아버지 핏줄은 저 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강 씨는 외할머니 손에 크게 되는데, 그 시절도 오래가지 못했다. 외할머니가 그의 양육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외손지를 괴느니 막게를 괴주’. 그게 무슨 말인지… 그런 말을 (외할머니로부터) 들었어요. 외손지는 키울 필요가 없다는 말인지… 혼자 살젠 허난 서럽고 외롭고… 이제는 눈물도 안 납니다. 악 밖에 안 납니다. 4.3이 나를 울렸어요.”

“외손지를 괴느니 막게를 괴주”.

‘외손자를 귀여워하느니(키우느니) 빨래방망이를 귀여워하는 것이 낫다’는 의미다. 외할머니가 부모를 잃은 열 살 아이에게 이토록 모진 말을 한 이유. 강 씨는 지금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강 씨는 그의 외할머니가 자신의 양육을 원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남은 유일한 혈육, 농사를 짓던 외삼촌은 생계가 빠듯해 강 씨를 책임질 여력이 없었다.

열 살 남짓 아이는 곧 외할머니 곁을 떠나야 했고, 그렇게 고아가 됐다.

이후 강 씨는 안 해본 일이 없다. 아이를 돌보는 일부터 시작해 육지로 나가 해녀 일을 하기도 했다. 그의 삶은 늘 생존과의 싸움이었고, 외로움을 견디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때는 무서운 때니까 혼인신고도 못하고, 우리 아버지 사진도 굴묵에 다 불태워 버렸어요. 누구 각시라고, 누구 자식이라고 잡아갈까 무서워서 사진들도 다 떼어서 불 살라버리고.”

제주4.3은 당시 금기어처럼 여겨졌다. 그의 아버지는 분명 희생자이건만, 사람들은 아버지를 ‘빨갱이’라고 했다.

당시 시대 상황이 이렇기에, 강 씨는 아버지가 아닌, 외삼촌 아래로 호적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낙인을 피하고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다.

“아버지 딸로 안되고, 외삼촌 밑으로 조카로 강순자 해서 올려 졌어요. 호적에 아버지 흔적이 없기 때문에 골머리가 너무 너무 아픕니다.”

그는 “아버지 강상룡의 딸, 강순자”라는 말을 듣는 것이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이라고 고백했다. 자신이 평생 “사람 노릇을 못하고 산 것 같다”면서.

“아버지 얼굴, 어스름하게만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꿈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깨보면, 내가 아버지! 아버지! 부르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뒷날은 아픕니다. 자꾸 아파요.”

아버지 꿈을 꾸고 나면, 몸이 아파 ‘신당(무당)’을 불러 치료한다는 강 씨. 그의 고통은 현재 진행형이다.

스무 번째 제주4.3 증언본풀이 마당 현장.

이날의 증언자는 강 씨 외에도 두 명이 더 있었다. 모두 강 씨처럼 ‘잃어버린 호적’의 사연을 가진 이들이다.

김정희 씨(여, 1949년생, 애월 고성)는 제주4.3 과정에서 호적이 엉망이 돼 현재 ‘가족관계등록부 정정 소송’을 진행 중이다. 오연순(여, 1948년생, 성산 수산) 씨는 아버지(오원보, 제주4.3 당시 억울하게 끌려가 고문당한 뒤 1950년 1월 광주형무소에서 옥사)의 딸로 호적을 올리는 소송을 제기해 2019년 7월 승소했다. 1심에서 패소했지만, 항소를 통해 “아버지는 ‘오원보’, 어머니는 ‘김무옥’임”을 확인 받았다.

제주에는 수 많은 강순자 씨, 김정희 씨, 오연순 씨가 있을 테다. 제주4.3 때문에 가족을 잃고, 호적에도 오르지 못해 ‘남’이 된 사연들이다.

이들은 지금도 잃어버린 호적을 되찾기 위해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스무 번째 제주4.3 증언본풀이 마당에 참석한 이진엽, 이민희 씨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한편, 이날 본격적인 증언이 이뤄지기 전에는 특별한 공연이 진행되기도 했다. 가수 이진엽, 이민희 씨가 직접 만든 곡, ‘나는 찐빵을 안 먹습니다’를 불러 헌정한 것이다 이 곡은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허영선 제주4.3연구소장의 글을 원작으로 한다.

<나는 찐빵을 안 먹습니다> 가사 중 일부...

“아무 생각없이 달려간 작은 빵 가게. 꼬깃해진 찐빵 한 꾸러미.

떠나는 트럭 위로 던져진 따뜻한 빵 한봉지. 떠나가네. 한마디 말도 못한 채.

어디론가 떠나가네. 가엾은 내 남편.

곧 돌아온다던 그의 모습. 그 뒷모습이 마지막 모습.

다시 볼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한번만 만나 봤으면.

남겨진 어린 우리 딸. 나는 너무도 궁금합니다. 그 빵은 잡숴 보셨는지, 그 온기가 전해졌는지.

떠나가네. 한마디 말도 못한 채, 어디론가 떠나가네.

가엾은 내 남편. 저 정뜨르 비행장. 끌려갔던 내 남편.

스물 두 살, 너무도 서럽고.

내 나이 아흔 둘. 오랜 살아 미안해요.

그 날 이후로 나는 찐빵은 먹을 수가 없어요.

먹을 수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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