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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대할망이 어느덧 내맘에 들어왔어요”
“설문대할망이 어느덧 내맘에 들어왔어요”
  • 김형훈 기자
  • 승인 2022.02.15 15: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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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으로 제주 읽기] <2> 오늘은 웬일일까요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뜨뜻한 아랫목에서 듣던 옛이야기. 무서움에 떨며 이불을 덮기도 했다. 그러면 무서움이 사라지나? 전혀 아니었다. 옛이야기는 어머니가 들려주기도 했고, 누이가 들려주기도 했다. 누이는 이야기를 잘 가공해서 동생들에게 들려주고, 그 이야기는 다시 누군가의 귓속으로 파고든다.

세상에 널린 숱한 이야기. 어디선가 떠돌아다닌다. 이처럼 떠도는 이야기는 누군가의 입에서 입으로 이어오길 반복했다. 시공을 초월한 이야기도 많다. 그런 이야기들은 어린아이의 가슴에 새싹처럼 앉는다. 판타지를 닮은 이야기들. 그럼에도 아이들에겐 단순한 판타지로 들리지 않는다. 자신의 이야기라도 되듯, 싹이었던 이야기는 뿌리를 내려 아이의 마음에 영원히 자리를 튼다.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어도 그 이야기는 뽑히지 않는다. 죽지 않는, 죽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뜨뜻한 아랫목은 이젠 만날 수 없다. 그렇더라도 옛이야기는 이어진다. 어머니와 누이의 입말로 이어지던 이야기에서 책이라는 형태로 달라졌을 뿐이다. 21세기를 사는 아이들도 옛이야기를 듣는다. 책으로 듣는다. 그런 아이들에게 어떤 이야기가 가장 매력적으로 들릴까. 제주에도 수많은 이야기가 존재하는데, 책으로 마주하는 이야기 중 어떤 게 매혹적일까. 아무래도 설문대할망이 아닐까. 제주도를 만들었다는 존재로서, 어마어마한 크기로서 아이들의 마음에 자리를 잡고 있을테니 말이다.

제주그림책연구회가 펴낸 <오늘은 웬일일까요>는 설문대할망을 소환해냈다. 아주 먼 과거. 언제였는지 알 수 없다. 온몸에 불을 담은 땅이 탄생할 때였으니, 그때가 언제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제주사람들이 창조해낸 설문대할망은 그때를 안다. 설문대할망은 300개가 넘는 제주의 오름을 만들고, 물장오리에 빠져 죽음으로써 ‘영원한 제주’를 말하고 있지 않던가.

설문대할망은 여느 곳에서 마주할 수 있는 거인 설화의 계열이라고도 한다. 중국의 반고가 있고, 세계 곳곳의 거인 설화들이 그 계열이다. 우리나라엔 ‘마고할미’로 대표되는 거인이 각 지역에 있다. 노고할미, 갱구할미, 개양할미, 황애장수할미, 서구할미, 안가닥할무이…. 불리는 이름도 많다.

설문대할망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사료는 장한철(1744~?)의 <표해록>이다. 설문대할망은 한문기록인 <표해록>에 ‘선마선파(詵麻屳婆)’로, ‘선마고(詵麻姑)’로 등장한다.

표류를 겪은 장한철 일행은 멀리 한라산이 보이자 살려달라고 외친다. 한라산을 향해 절을 하면서 살려달라고 외친다.

“백록신선이시어,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白鹿屳子, 活我活我)”

이어 또 외친다. 이젠 백록신선이 아닌, 할망을 부른다.

“설문대할망이시어,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詵麻屳婆, 活我活我)”

장한철은 배에 탄 제주사람들이 외친 두 인물, 즉 백록신선과 설문대할망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제주사람들이 전하기를, 신선 할아버지가 흰 사슴을 타고 한라산 위에서 노닐었다고 한다. 또 아주 오랜 옛날엔 설문대할망[詵麻姑]이 있었는데, 걸어서 서해를 건너와 한라산에서 노닐었다고 한다. 설문대할망[詵麻]과 백록신선[白鹿]에게 살려달라고 하는 이유는 하소연할 데가 없어서 그렇다.”

'오늘은 웬일일까요'의 목판화. 설문대할망이 오름을 어루만지고 있다. 미디어제주
'오늘은 웬일일까요'의 목판화. 설문대할망이 오름을 어루만지고 있다. ⓒ미디어제주

장한철이 살던 때는 한라산을 바라보며 하르방에게도 빌었는데, 지금은 설문대할망만 남았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이야기만 여기저기 흩어져 남아 있다.

하르방은 가고, 할망만 남았으나 할망은 이젠 신격 대접을 받는다. 원래의 이야기에 이야기를 덧대며, 소위 ‘스토리텔링’ 작업이 이뤄졌다. 어쨌든 살아남은(?) 설문대할망은 제주를 창조한 여신으로 어느새 지위가 올라갔다.

현용준의 <제주도 전설>을 들여다보면 ‘선문대할망’이라는 제목이 보인다. 현용준 자신이 어릴 때 들었던 이야기를 담았고, 1970년대 구술해준 어르신들이 어릴 때 들었던 설문대할망에 대한 이야기들이 책에 담겼다. 내용을 잠시 옮겨본다.

- 설문대할망은 키가 너무 커서 한라산을 베개 삼고 누우면 다리는 제주시 앞바다에 있는 관탈섬에 걸쳤다고 한다.

- 수많은 오름은 할망의 치맛자락에서 흙을 나를 때 터진 구멍에서 흙이 빠져나와 만들어졌다.

- 명주 100통을 모으면 육지까지 다리를 놓을 수 있다는데, 99통만 모여서 섬으로 남았다.

- 우도(소섬)는 원래 섬이 아니었는데, 할망의 오줌 줄기 때문에 땅이 갈라지면서 섬이 되었다고 한다.

- 한쪽 발은 한라산을 밟고, 한쪽 발은 소섬을 밟고 서서 바닷물에 빨래를 했다 한다.

- 큰 키가 자랑이던 할망은 제주 곳곳에 있는 물마다 깊이를 시험하다가 물장오리에 빠져 죽었다.

제주에 있는 오름을 만들었고, 육지에 다리를 놓으려 했던 인물. 빨래도 자주했다는 할망.

우리는 그 이야기를 토대로 새로운 이야기를 얹곤 한다. 제주그림책연구회의 <오늘은 웬일일까요>는 제주 이야기를 그림으로 제대로 펼쳐보자는 뜻에서 나왔다. 연구회 회원들은 판화라는 색다른 작업을 하며 그림책을 만들었다.

<오늘은 웬일일까요>를 펼치니, 바람이 불면서 제주를 상기시킨다. 곧이어 제주의 상징이 나온다. 백록담이다. 뒤이어 얼굴 붉은 한라산이 나온다. 화산폭발을 할 모양이다.

오늘은 웬일일까요?
한라산 얼굴이 붉어지네요.
한라산이 우르릉 흔들리네요.
하늘 높이 불기둥이 솟아올라요.
서천 꽃밭 문도 드르릉 흔들리네요.
오늘은 웬일일까요?
환생꽃, 웃음꽃, 소망꽃 떨어지네요.
꽃향기가 싸아 퍼져 가네요.
환생꽃 하나 물장오리에 떨어지네요.
“아이고, 푸지게도 잤~져.”
오늘은 웬일일까요?
설문대할망이 바다를 휘저어요.
설문대할망이 오름을 쓰다듬어요.
설문대할망이 오백 아들을 꽈악 끌어 안아요.
- <오늘은 웬일일까요> 중에서

<오늘은 웬일일까요>는 제주의 탄생을 신화와 잘 섞어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엔 물장오리에 빠져 죽는 설문대할망이지만 <오늘은 웬일일까요>는 서천 꽃밭에 있는 꽃을 피워 물장오리의 설문대할망을 되살린다. <오늘은 웬일일까요>는 설문대할망만 살린 게 아니다. 제주를 이야기하려 들지 않던 이들에게, 제주를 마음 놓고 이야기하라고 한다. 그러다 보면 사라졌던 ‘백록선인’도 살아날지 누가 알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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