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8 21:23 (목)
"검찰 항고? 제주4.3 유족 간절한 마음, 짓밟지 말아주세요"
"검찰 항고? 제주4.3 유족 간절한 마음, 짓밟지 말아주세요"
  • 김은애 기자
  • 승인 2022.03.11 21: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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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제주4.3 일반재판 수형인 박경생 씨의 딸, 박부자 씨

8살 때 끌려간 아버지, 광주형무소 2년 금고형 후 행방불명
"검찰 항고, 유족들의 간절한 마음 짓밟는 처사... 납득 안 돼"
제주4.3을 상징하는 동백꽃.

“70여년 전 우리 아버지를 끌고가서 생사도 모르게 만들어 놨으면, 책임을 져야죠. 희생자들이 재심 신청을 안 하더라도 나라에서 해줘야 하는 거잖아요. 무죄 판결을 그냥 내려줘야 하는 거잖아요. 그거 기다리다가 내가 먼저 죽을 것 같아서 재심을 청구했는데, 검찰 항고라니. 마음 같아서는 정말 당장 제주지방검찰청 찾아가서 우리 아버지를 살려내라고 따지고 싶어요. 멀쩡한 사람 잡아다가 죄 만들어서 가두고, 결국 시체도 못 찾아서 행방불명 만들었잖아요. 그걸 바로잡겠다고 유족들이 재심 청구했더니, 그걸 또 항고를 해요? 정말 분통이 터지고, 억울합니다.”

제주4.3 희생자 박경생(당시 39세)씨의 딸 박부자(84) 씨가 말했다.

제주지방검찰청은 지난 10일, 제주4.3 일반재판 수형인 14명에 대한 법원의 재심개시결정에 항고를 제기했다. ‘법리적 오해’가 있어 이를 바로잡으려 한다는 것이 항고의 이유였다. 검찰은 ‘4.3희생자에 대한 심사자료가 없는 상태에서 개심재시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에, 보완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반면 유족 측은 이것이 “검찰의 과도한 공권력 행사”라고 본다. 검찰의 항고는 제주4.3특별법 규정의 취지에 맞지 않는 결정이라는 지적이다.

유족들은 법원의 재심개시결정에 아무런 흠결이 없음을 강조한다. 제주4.3 희생자는 4.3특별법에 의해 결정된 사안인데, 재심개시심사 단계에서 자료 미흡으로 재심개시를 막는 것은 부당하다는 입장이다.

이에 <미디어제주>가 인터뷰를 청한 재심청구인 박부자 씨는 “오는 4월 3일, 제주4.3희생자추념식 희생자명비를 찾으려 했다. 그리고 아버지께 ‘재심 개시가 결정됐다’는 사실을 웃으며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젠 불가능하게 됐다”라는 사실을 토로했다.

박부자 씨는 제주4.3 때 아버지를 잃었다. 박 씨가 8살 되던 해. 그의 아버지는 경찰에 잡혀갔고,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저는 마당에서 혼자 놀고 있었고, 아버지는 방에 그냥 누워 있었어요. 그런데 경찰이 와서 아버지를 그냥 붙잡아갔어요. 모자도 막 삐딱하게 쓰고, 총을 메고 있는 경찰이었어요. 그게 내가 아버지를 본 마지막 날이었어요.”

어린 박 씨는 경찰이 그의 아버지를 발로 차며 마구잡이로 끌고 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제 고향이 애월인데요. 지서 앞 버스정류장에 차를 세워서 사람들을 싣고 가는 걸 이모나 우리 할머니들이 봤다고 했어요. 거기에 우리 아버지도 있으니까 저보고 가서 마지막 인사하고 오라고. 그래서 갔더니 사람들이 꽉 차있고, 아버지가 어디 계신지도 모르겠더라고요. 결국 아버지를 찾지 못하고 집에 와버렸죠.”

박 씨의 기억에 의하면, 당시 동네 사람들은 “경찰이 잡아간 사람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단다. 오늘은 옆집, 다음날은 옆옆집, 그 다음달은 옆옆옆집… 잡혀간 사람들은 죽임을 당한다는 소문이 마을에 파다했다.

이후 50여년 세월이 흘렀다. 2000년, 김대중 정권에서 제주4.3 희생자 신고 접수가 이뤄지게 된다. 박 씨는 이를 계기로 아버지 행방 찾기에 본격 착수했다 밝혔다.

당시 박 씨가 아버지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은 “4.3 때 경찰에게 끌려갔다”라는 사실 하나 뿐이었다. 이에 박 씨는 정부기록보존소(현 국가기록원)를 찾았다고.

“그때 거기 직원에게 제 신분증을 주고 사정을 했어요. 4.3희생자 유족인데, 아버지 소식을 알 길이 없어서 희생자 신고를 못 하고 있다고. 직접 기록을 보고, 아버지 행방을 찾으려 한다고.”

지금이야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때는 가능했다. 직원의 협조로 박 씨는 3일 동안 정부기록보존소에 출근도장을 찍었고, 수많은 서류를 확인한 끝에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제서야 알았어요. 아버지가 광주형무소로 끌려가 2년 금고형을 받았다는 사실을요. 착잡한 사실은 사건번호 하나에 9명이 한꺼번에 기재되어 있었다는 거예요. 우리 아버지는 남로당 공작 자금으로 500원을 줬다는 것이 죄목이었는데, 말도 안 되는 일이죠. 아버지는 평범한 농민이셨어요.”

제주4.3희생자 박경생 씨에 대한 재판 내용이 담긴 판결문 자료. (사진=딸 박부자 씨 제공)

50여년이 지나서야 아버지의 죄목을 알게 된 박 씨. 그는 아버지가 “죄인 아닌 죄인이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판결 이후 아버지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라며 “누군가는 바다에 수장됐다고 하고, 어떤 이는 총살당했다 하더라”라고 덧붙였다.

“아버지가 계셨으면 고생이라는 걸 모르고 살았겠지만, 고생을 많이 했죠. 우리 어머니는 60살까지도 못 살고 돌아가셨어요. 우리 어머니가 얼마나 가슴앓이를 하고 살았나, 어릴 때는 몰랐는데 지금은 알 것 같아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하신 말이 있어요. ‘내 손으로 박박 흙이라도 파서 (아버지 유해를) 묻었으면 분이라도 풀리겠다. 어디에 가서, 누구에게, 무엇을 하소연해야 할 지 모르겠다’라고. 지금도 어머니 생각을 하면 가슴이 저립니다.”

박 씨는 학창 시절 ‘아버지’라는 말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노라 고백했다. 입에 담으면 눈물이 주룩 날 것 같아 일부러 피했다고.

“학교에서 다른 애들이 ‘우리 아버지가 어쩌고 저쩌고’ 이야기를 하면, 나는 숨어버리고 그랬어요. 아버지가 그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나는 아버지라고 부를 상대가 없는 거잖아요. 아버지를 한 번이라도 불러보고 싶은데, 부를 아버지가 없는 거예요.”

박 씨는 억울하게 사라져버린 영혼들을 위로하지는 못할 망정, 검찰이 항고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에 참담함을 느꼈다 말했다. 그러면서 기자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재심 청구한 사람들, 유족들이 왜 재심을 청구한 지 아시나요? 재심으로 우리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왜 자기 돈 들여서 힘들게 유족들이 재심을 청구하는지 검찰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제가 재심을 청구하는 이유는 ‘이제라도 우리 아버지 영혼을 위로하고 싶어서’예요. 지금 우리 아버지는 죄인으로 기록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살아있을 때 그 ‘죄인’이라는 낙인이라도 지우고 싶어서, 재심을 청구한 겁니다. 이 간절한 마음은 그 누구도 짓밟으면 안 되는 겁니다.”

검찰의 항고로 박 씨를 비롯한 청구인들의 재심사건은 지연이 불가피하게 됐다. 항고에 대한 재판은 광주고등법원 제주부에서 진행되며, 기일은 아직 미정인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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