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목관아는 조선만 알고 4·3은 모른다”
“제주목관아는 조선만 알고 4·3은 모른다”
  • 김형훈 기자
  • 승인 2022.06.08 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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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유해를 걷다] <3> 건축으로 만나는 1947년 3월 1일

 

제주 사람들에게 4·3은 운명과도 같다. 제주 사람들에게 숫자 ‘4·3’은 단순하지 않다. 현대사를 오롯이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키워드이다. 숫자 ‘4·3’이라는 키워드가 중요한 이유는 시대를 관통하는 역사라는 이유만 있지 않다. 거기엔 기억이 들어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안다. 제 몸에 난 생채기를. 우리는 그런 기억을 누군가에게 또다른 기억으로 전해줄 의무가 있다.

기억은 사라지면 회복 불가능하다. <미디어제주>는 그런 기억을 잇게 만드는 기획물을 시작한다. ‘4·3 유해를 걷다는 이름을 단 기획물이다. 이 기획물은 마을신문인 <아라신문> 학생기자들도 동행한다.

제주도 곳곳에 흔적으로 남은 4·3 유적지. 그때 그 모습으로 기억을 지닌 곳도 있고, 사라진 곳도 있다. ‘4·3 유해를 걷다는 특정 주제를 정해서 유적지를 들여다본다. 문학을 통해 이야기된 4·3의 장소를 보기도, 남은 건축물을 통해 4·3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편집자주]

 

 

발포 현장이던 망루와 경찰서는 기억에만 존재

‘조선’은 남아 있고 ‘현대사’는 현장에서 사라져

도립병원도 수백 년 된 녹나무만 그때를 기억

관덕정은 보물로만 기억된다. 조선의 역사를 지닌 관덕정은 수많은 제주목사를 맞았고, 그들의 활쏘기를 지켜봤다. 해방 이후엔 도청 청사로도, 북제주군 청사로도 잠깐 이용되기도 했다. 1947년 3월 1일 발포현장을 지켜본 주인공도 바로 관덕정이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이 제주읍에서 일단의 좌익 3‧1절 행사 참가자들을 공격하여 몇 사람을 죽이기 전까지는 제주섬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선동하여 일으킨 소요들은 제주도를 점령하고 있는 미군에 의하여 비교적 느슨하게 억제되고 있었다. 공격을 받은 섬 주민들은 경찰에 대하여 즉각적인 보복을 하였고 1년여에 걸친 유혈폭력이 시작되었다.”
- <주한미육군사령부 일일 정보보고> 중에서

1947년 3월 1일은 1948년 4월 3일만큼 중요하다. 주한미육군사령부의 문서에서 보듯, 3월 1일은 4월 3일 이전에 발생한 각종 유혈폭력의 시작이라고 보고 있다. 결국 4월 3일과 연관될 수밖에 없다. 그만큼 중요한 날이다. 그럼에도 관덕정 어디에도 4.3은 없다. 관덕정이라는 건축물은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현대사의 각종 현장을 지켜봤음에도 ‘4.3’이라는 숫자 혹은 ‘3월 1일’이라는 문구도 없다. 관덕정은 그냥 보물 제322호이며, 조선시대에 머문 ‘박제된 기억’일 뿐이다.

관덕정 앞에서 현대사를 듣고 있는 아라신문 마을기자와 학생기자들. 미디어제주
관덕정 앞에서 현대사를 듣고 있는 아라신문 마을기자와 학생기자들. 관덕정을 설명하는 문구엔 1947년 3월 1일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아라신문

1947년 3월 1일은 대체 어떤 일이 있었을까. 이날 북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제28주년 3·1절 기념식을 마친 수만 명의 제주도민들이 동서로 나뉘어 시위를 펼쳤다. 경찰은 읍내 곳곳에 배치됐는데, 육지에서 내려온 기마경찰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바로 문제의 기마경찰이다. 제주도감찰청(현재 제주도경찰청) 소속 기마경찰은 1947년 1월 26일 조직된다. 관덕정 광장에서 기마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치어 소란이 발생했다. 오후 2시 50분쯤의 일이었다. 그런데 기마경관은 북신로에 있던 감찰청 쪽에서 관덕정 옆에 자리잡고 있던 제1구경찰서로 보고하러 가던 중 어린이를 친다. 기마경관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구호조치를 하지 않고 경찰서 쪽으로 향했다.

시위군중은 없던 시각이다. 100명 가량의 구경꾼만 있을 뿐이었다. 그 장면을 본 군중들이 소리치고 몰려왔다. 말을 향해 돌을 던지는 사람도 나타났다. 기마경관은 말을 몰아 경찰서 쪽으로 향하고, 바로 그 순간 총소리가 난다. 첫 발포는 관덕정 앞에 배치됐던 무장경관의 총구에서 나왔다. 경찰서 정문 안쪽의 망루 위에서도 발포가 이어졌다.

당시 희생자는 경찰서와는 먼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식산은행 앞 거리와 제주도립병원으로 들어가는 골목 모퉁이, 관덕정 남쪽 지점의 경찰관사 앞에서 사람들이 쓰러졌다. 피해자는 한 사람만 빼고는 전부 등 뒤에서 총을 맞았다.

경찰의 발포로 모두 6명이 목숨을 잃었다. 4명은 현장에서 죽고, 2명은 도립병원으로 후송됐으나 목숨을 건지지 못했다. 사망자는 박재옥(21·도두리), 허두용(15·오라1리), 오문수(34·아라리), 김태진(38·도남리), 양무봉(49·오라3리), 송덕수(49·도남리)였다. 박재옥 여인은 3개월 젖먹이를 안고 있었는데, 젖먹이 어깨에도 총알이 스쳤다고 한다. 젖먹이는 당시엔 생명에 지장이 없었다고 하지만 얼마 안되어 숨을 거두었다고 전한다.

관덕정 발포사건이 일어나고, 도립병원에서도 곧 경찰 발포 사건이 발생했다. 그날 병원 앞을 경비하던 경관은 2명이었다. 전날 교통사고를 당한 응원경찰이 입원해 있었고, 동료 경찰 2명은 경호를 겸해서 경비를 서고 있었는데 관덕정 앞에서 발포소리가 나자 이문규 순경(충남 공주경찰서)이 총을 쏘며 난동을 부렸다. 그 난동으로 시민 2명이 중상을 입는다.

예기치 못한 사고는 도민들의 분노를 사게 된다. 그러나 미군정청은 사태진압을 위해서는 시위 주동자를 검거하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에 응원경찰 증강을 요청하고, 3·1절 기념식을 주도한 이들에 대한 색출에도 나선다. 민심은 더 흉흉해졌다.

제주 전역에서 피해자에 대한 구호모금이 이뤄지고, 경찰의 과잉진압에 맞서는 3월 10일 총파업이 진행된다. 제주도청도 파업에 나섰으며, 당시 총파업에 참여한 이들은 166개 기관 4만1211명이었다고 한다. <제주신보>는 3월 12일자 사설을 통해 “시위대가 현장에 없었던 사실을 이야기할 증인이 필요하다면 몇십 명이라도 증언케 할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제주신보>는 경찰의 3월 1일 발포를 지적했고, 제주도감찰청은 마치 <제주신보>가 허위보도를 하고 있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자 도감철청의 성명에 발끈한 <제주신보>는 3월 12일자 사설을 통해 언론으로서 ‘평신저두(平身低頭)’, 즉 ‘몸을 낮추고 머리를 숙이기’에는 언론인의 자존이 허용하지 않는다면서 3.1 발포에 대한 보도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관덕정에서 바라보면 제주목관아 입구인 진서루와 회랑이 보인다. 하지만 1947년 3월 1일 현장은 어디에도 없다. 미디어제주
관덕정에서 바라보면 제주목관아 입구인 진서루와 회랑이 보인다. 하지만 1947년 3월 1일 현장은 어디에도 없다. ⓒ아라신문

그때 현장을 기억하고 있는 건축물은 관덕정이 유일하다. 관덕정은 제주4·3의 시작과 끝을 안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로 제주도민들이 죽은 사건을 기억하고 있고, 무장대 마지막 사령관인 이덕구의 주검이 관덕정 광장에 내걸린 그 일도 알고 있다. 그러나 어디에도 4·3과 관련된 이야기의 흔적을 관덕정이나 목관아 일대에서는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다.

대체 어디쯤이 1947년 3월 1일 발포 현장이었을까. 건물이 있던 곳의 기억을 더듬어야 한다. 발포했다는 경찰서도, 망루도 없다. 복원된 목관아 회랑 일대에 망루가 있었고, 경찰서가 존재했다는 어렴풋한 기억만 남아 있다. 제주목관아는 1993년 국가사적 제301호로 지정됐고, 2002년 12월 복원이 완료되면서 조선시대로 되돌아간다. 덩달아 제주 현대사는 사라졌다.

제주도립병원도 마찬가지이다. 자혜의원으로 시작된 도립병원은 제주대병원을 거쳐, 예술공간 이아와 제주대 창업보육센터로 쓰이지만 역시 4.3은 없다. 다만 수백 년 묵은 녹나무만 그날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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