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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청이라는 이름은 제주도민들에게 두려움 그 자체였다”
“서청이라는 이름은 제주도민들에게 두려움 그 자체였다”
  • 김형훈 기자
  • 승인 2022.06.14 03: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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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유해를 걷다] <4> 서청의 사라진 기억

제주 사람들에게 4·3은 운명과도 같다. 제주 사람들에게 숫자 ‘4·3’은 단순하지 않다. 현대사를 오롯이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키워드이다. 숫자 ‘4·3’이라는 키워드가 중요한 이유는 시대를 관통하는 역사라는 이유만 있지 않다. 거기엔 기억이 들어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안다. 제 몸에 난 생채기를. 우리는 그런 기억을 누군가에게 또다른 기억으로 전해줄 의무가 있다.

기억은 사라지면 회복 불가능하다. <미디어제주>는 그런 기억을 잇게 만드는 기획물을 시작한다. ‘4·3 유해를 걷다는 이름을 단 기획물이다. 이 기획물은 마을신문인 <아라신문> 학생기자들도 동행한다.

제주도 곳곳에 흔적으로 남은 4·3 유적지. 그때 그 모습으로 기억을 지닌 곳도 있고, 사라진 곳도 있다. ‘4·3 유해를 걷다는 특정 주제를 정해서 유적지를 들여다본다. 문학을 통해 이야기된 4·3의 장소를 보기도, 남은 건축물을 통해 4·3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편집자주]

 

 

서청은 유해진 지사의 호위병으로 제주에 입성

행정 2인자도 죽이고, 신문사까지 접수하기도

‘서청’ 터를 알리는 표지는 전혀 눈에 띄지 않아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4·3의 기억 가운데 가장 치를 떨게 만드는 존재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서청’이다. 서청은 제주도민들에게 이름 자체가 무서움이었다. 서청은 ‘서북청년회’의 줄임말인데, 제주에서는 ‘서북청회’보다는 ‘서북청년단’이라는 이름을 더 자주 쓴다.

서북청년단은 다양한 이유로 북한 체제에서 생존이 어려워서 월남한 청년 학생들이 중심이 된다. 북에서 온 그들은 여러 단체를 통합해 1946년 11월 30일 서북청년단으로 발족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북한의 ‘반동분자’에서 남한의 ‘애국자’로 거듭난다. 좌익을 처단하는 그들의 행동이 곧 ‘애국’이었다.

서북청년단은 특정 종교와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한경직 목사는 생전 인터뷰에서 서청과 4·3의 연관성을 거론하기도 했다. 다음은 김병희가 펴낸 ≪한경직목사≫라는 책에 있는 내용이다.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시요.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요.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

- 김병희 편저 ≪한경직목사≫ 중에서

이렇듯 4·3과 깊은 인연을 지닌 서북청년단. 그들은 제주도에 모두 3차례 파견된다. 첫 발걸음은 박경훈 지사 후임으로 내려온 유해진 지사의 호위병이었다. 유해진 지사는 1947년 4월 20일 제주에 들어왔다. 그가 오기 전 제주도는 3월 1일 행사로 도민들의 민심을 알렸고, 3월 1일 발포에 항의하며 3·10 총파업을 일으키기도 했다.

유해진 지사는 그런 제주도민의 심정과는 딴판이었다. 그는 오자마자 총파업 주동자를 색출하는데 골몰했고, 그가 데려온 서북청년단 7명은 아픈 고통의 서막과도 같았다. 지사가 데리고 온 서청 호위병은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바라보는 인식이나 다름 없었다.

“서청은 4·3 진압과정에서만이 아니라 그 발발 과정의 한 요인으로 거론될 정도로 4·3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제주도에서 서청은 ‘공산당을 때려 잡는다’는 구실 아래 애매한 사람들까지 ‘때려 잡는’ 일이 많아서 제주도민과 가장 마찰을 빚던 집단의 하나였다. 그런 서청의 제주 출현이 신임 도지사의 호위에서 비롯됐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도민과 가장 가까이 있어야 할 목민관이 사병(私兵)으로 ‘인의 장벽’을 쌓은 것부터가 심상치 않은 조짐이었다.”

-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1≫ 중에서

제주에 들어온 서청은 태극기나 이승만 사진 등을 반강압적으로 팔곤 했다. ‘서청’이라고 하면 울던 아기도 울음을 그친다고 할 정도였다.

1947년 말에는 우익이 강력했음에도 서청은 자신들의 입지를 위해 미군방첩대에 “제주도는 조선의 작은 모스크바”라고 보고하곤 했다. 미군방첩대의 정보보고서엔 “서북청년단장이 제주도는 조선의 작은 모스크바라고 하는데, 그는 자신의 주장을 방첩대에 증명해 보이려고 애썼다. 이런 주장은 제주에서 최근 우익의 강력한 발전을 보여주는 다른 정보와 정반대된다”고 기록돼 있다.

아라신문 마을기자와 학생기자들이 서북청년단의 기억을 지닌 제주시 원도심의 칠성로 일대를 걷고 있다. 미디어제주
아라신문 마을기자와 학생기자들이 서북청년단의 기억을 지닌 제주시 원도심의 칠성로 일대를 걷고 있다. ⓒ미디어제주

서북청년단은 적산가옥을 표적으로 삼기도 했다. 서청은 칠성로에 있던 적산가옥 2층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아래층까지 탐을 냈다. 아래층엔 함석그릇을 팔던 일본인 상점을 물려받은 강성옥씨 집이었다. 강성옥씨 집안에 제사가 있던 날, 서청은 2층 바닥에 구멍을 뚫고 오줌을 싸서 제사상 위에 떨어뜨린다. 항의를 하러 올라 온 강성옥씨에겐 뭇매를 가한다.

서청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1948년 11월 9일엔 제주도 행정 2인자인 총무국장을 죽이는 일까지 벌인다. 보급문제에 불만을 품었다고 알려져 있다. 서청 김재능 단장이 김두현 국장에게 구호물품인 광목을 달라고 요구하자, 김두현 국장은 “구호대상이 아니면 곤란하다. 피습을 당한 서귀포 등지에 보낼 광목도 부족하다”면서 요구를 받아주지 않았다.

불만을 품은 서청은 김두현 국장을 서청 사무실로 불러내 매질을 하고, 김두현 국장이 실신하자 구호조치도 하지 않은채 밖으로 내버려 끝내 죽음에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서청은 사람을 죽이면 무조건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였다. “김두현 국장은 공산주의자이며, 죽이려 한 건 아니고 조사를 하려 했을 뿐이다”며 발뺌했다.

서청은 신문사까지 건든다. 언론사도 서청에겐 별 게 아니었다. 김두현 국장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기 며칠 전이었다. 제주읍내 유지들이 속속 제주농업학교로 끌려가던 와중에 삐라사건이 발생했다. 10월 24일 이덕구 명의의 선전포고문과 호소문이 읍내 곳곳에 뿌려졌다. 수사를 벌였더니 제주신보사에서 찍어낸 것으로 드러났다. 제주신보사 편집국장이면서 주필이던 김호진이 인쇄한 것으로 밝혀졌다. 김호진은 백록일보의 창간 멤버였으나 백록일보와 제주신보가 통합되면서 제주신보 편집국장으로 발탁된 상황이었다. 김호진은 “산군의 부탁이다”며 인쇄를 했다고 한다. 삐라를 뿌린 김호진은 제주농업학교로 붙잡혀갔다. 당시 제주신보 사장은 초대 지사였던 박경훈이었다. 박경훈 사장도 붙잡혀가긴 했으나 삐라 제작과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밝혀져 무사히 풀려났으나 김호진은 잡혀온지 사흘만에 처형된다.

서청의 흔적을 알리는 표지판이다. 원도심을 무심코 지나는 이들에겐 젼혀 들어오지 않는다. 미디어제주
서청의 흔적을 알리는 표지판이다. 원도심을 무심코 지나는 이들에겐 젼혀 들어오지 않는다. ⓒ미디어제주

결국 제주의 유일한 신문이었던 제주신보사는 서청에 의해 강제 접수를 당한다. 김호진의 삐라 사건 이후에 서청이 곧바로 제주신보를 접수했다고 하지만 송요찬 연대장이 군작전 홍보를 위해 신문이 필요했고, 때문에 서청에게 곧바로 넘어간 건 아니라고 한다. 서청이 제주신보를 강제 접수한 건 1949년 2월이나 3월쯤으로 보인다. 지금으로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 서청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서청이 쓰던 건물이나 그들이 접수한 제주신보는 사라졌지만, 이들 건물이 서 있던 땅은 변함없이 남아 있다. 칠성로 일대에 들어선 새로운 건물이 그 땅을 대신 딛고 있다. 그러나 칠성로 일대는 서청이 피를 뿌리던 흔적의 땅이다. 지금은 어느 지점을 정확하게 일컬어 서청의 터였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작은 안내판만 소심하게 몇미터 동쪽에 있다고 화살표로 알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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