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하늘을 향해 소원을 들어달라 하지요”
“누구나 하늘을 향해 소원을 들어달라 하지요”
  • 김형훈 기자
  • 승인 2022.06.21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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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으로 제주 읽기] <4> 하늘에 비는 돌, 조천석

비날씨에 마음을 졸이는 이들이 많다. 예전엔 더더욱 그랬다. 제주도는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이어서 물난리는 피하지 못할 운명과도 같다. 때문에 물을 관리하는 ‘치수’는 정치를 하는 이들에겐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였다.

“제주에 큰비가 내려서 물이 제주성에 들어와 관의 건물과 민가가 침수되고, 곡식 역시 대부분은 물에 잠겼다.”
- ≪태종실록≫ 16권, 태종 8년(1408) 8월 19일 갑오 1번째 기사

≪태종실록≫ 원문을 보면 ‘큰비’는 ‘대우(大雨)’로 나오는데, 음력 8월(양력으로 환산하면 9월이 된다)이었으니 태풍이었을 수도 있다. 그 비로 관아도 잠기고 민가도 큰 피해를 입었다. 수확을 앞두고 있던 곡물까지 침수될 정도였으니 대단한 물난리였음을 알게 된다. 그러니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지 않았을까.

제주성은 동서로 하천을 끼고 있다. 서쪽은 병문천, 동쪽은 산지천이다. 당시 제주성에 물난리를 입힌 하천은 산지천으로 여겨진다. 큰비로 산지천이 범람하면서 피해를 준 일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제주성은 산지천 하류와 접한다. 큰비가 오면 산지천 하류가 범람했다는 상상은 충분히 하고도 남는다.

제주성은 1555년(명종 10)에 발생한 을묘왜변으로 변화를 맞는다. 적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제주성을 동쪽으로 확장하는 작업이 진행됐다. 그 결과 1566년(명종 21) 곽흘 제주목사 때 제주성은 산지천을 품게 된다. 이로써 산지천은 제주성의 외곽에 있는 하천이었다가, 성을 관통하는 하천으로 거듭난다.

문제는 비가 많이 내릴 때였다. 산지천이 제주성 내에 들어오면서 물난리에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200여 년이 흐른 뒤에야 물난리를 피하는 해결책이 나왔다. 김영수 제주목사 때였다.

“물난리를 피하고자 읍내에 간성(間城)을 쌓고, 2개의 문을 세웠다. 남쪽에 있는 문은 ‘소민’이라고 하고, 북쪽에 있는 문은 ‘수복’이라고 했다.”
≪탐라기년≫ 3권, 경자 4년(1780)

‘간성’은 글자 그대로 ‘성과 성 사이에 쌓는 성’을 말한다. 김영수 목사 때 세운 간성은 산지천을 끼고, 바로 서쪽에 세웠다. 그러니까 폭우가 내려 산지천이 범람하더라도 제주성 서쪽은 물난리를 피할 수 있도록 한 조처였다. “물난리를 피하고자 간성을 쌓았다”고 한 걸 보면, 김영수 목사 때 세운 간성은 제방용 역할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건 간성이 아니다. 산지천에 있는 ‘조천석(朝天石)’이다. 제주 관련 사료 가운데 이원진 제주목사가 쓴 ≪탐라지초본≫이 조천석의 존재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19세기 때 제주목사를 지낸 이원진은 ≪탐라지초본≫에 “산저교는 동성 안에 있는데, 김정 목사가 광제교로 이름을 바꿨다. 그 다리 앞에는 조천석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진 지주암이 있다”고 쓰고 있다. 사람들은 ‘조천’이라는 글자에 주목하며, 제주시 조천읍을 가리키는 게 아니냐는 이들도 있으나 조천석은 지명 조천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탐라지초본≫에 나오는 지주암은 경천암으로도 불린다. 경천암과 조천석은 이름에서 보듯, 하늘과 인연이 있다. 경천암(擎天岩)은 ‘하늘을 떠받드는 바위’라는 뜻이며, 조천석도 그런 의미를 담았다. 그런데 ‘조천’은 중국 고사에 등장하는 단어는 아니다. 오히려 한국적이다. 고구려 탄생과 관련된 동명성왕이 ‘조천’과 관련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삼국유사≫에 그 흔적이 있다.

“옛 평양성은 ‘신월성’이었는데 (당 태종이 보낸) 도사들의 주문으로 용에게 명해 ‘만월성’으로 만들었다. 때문에 ‘용언성’이라고도 한다. 도사들이 신령스러운 돌인 ‘영석(靈石)’을 파서 깨뜨리기도 했다. 그 돌은 속설에 ‘도제암’이라고 하고, ‘조천석(朝天石)’이라고도 한다. 옛날에 성제(聖帝·동명성왕)가 이 돌을 타고 옥황상제를 조회했기 때문이다.”
- ≪삼국유사≫ 3권, 흥법 보장봉로 보덕이암 조(條)

조천석은 ≪고려사≫에도 등장한다.

“옛날 동명왕의 구제궁이 있는데, 그 안에 기린굴이 있고 굴의 남쪽 백은탄에는 바위가 조수에 따라 드러났다가 잠겼다가 한다. 그 바위를 조천석(朝天石)이라 부른다.”
- ≪고려사≫ 지(志), 권12

윤유(1674~1737)가 편찬한 『평양속지』에 수록된 '평양관부도(平壤官府圖)'. 이 지도에서 조천석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1730년. 국립중앙박물관
윤유(1674~1737)가 편찬한 『평양속지』에 수록된 '평양관부도(平壤官府圖)'. 이 지도에서 조천석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1730년. ⓒ국립중앙박물관

고구려 건국신화와 관련된 조천석. 동명성왕이 그 돌을 타고 하늘에 있는 옥황상제를 만났다고 옛 기록은 말한다. 그런데 왜 제주도에 조천석이 세워졌을까.

이진영 제주대박물관 특별연구원은 이와 관련, 조천석은 탐라의 건국신화인 삼성신화를 품고 있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평양의 조천석이 고구려의 건국을 담고 있는만큼, 제주에 있는 조천석도 그러리라는 가설이다.

이진영 연구원은 아울러 조천석은 ‘조천’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석상이 아니라, 조천석 아래에 있는 경천암이 곧 조천석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조천 두 글자가 뚜렷한 석상은 ‘조천석비’라고 부르는 게 맞다고 한다. 더구나 조선시대 평양을 그린 지도엔 마치 섬처럼 돼 있는 곳에 ‘조천석’이라고 표기를 한 걸 보면, 그런 추론도 가능하리라 본다.

어쨌든 조천석은 하늘과 인연을 지닌다. 그게 삼성신화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조천석이 삼성신화와 연관이 있으리라는 추론은 타당한 면도 없지 않지만, 세간의 인식은 그러잖다. 오히려 산지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조천석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대세로 자리를 잡고 있다.

제주그림책연구회는 조천석이 범람을 막는 기능을 할 것이라는 추론을 담아 ≪하늘에 비는 돌, 조천석≫이라는 그림책을 내놓기도 했다. 2007년 나온 이 그림책은 제주를 휩쓸었던 태풍 ‘나리’의 아픈 기억이 더 없기를 바라는 염원도 들어 있다. 2007년 9월에 제주를 강타한 태풍 ‘나리’는 제주시내 모든 하천을 범람시켰고, 수많은 인명피해도 일으켰다. ≪태종실록≫에 등장한 9월의 물난리도 다르지 않았을게다.

'하늘에 비는 돌, 조천석'에 나오는 조천석의 뒷면. '경자년 봄에 우산(牛山)이 썼다'는 내용이다.
'하늘에 비는 돌, 조천석'에 나오는 조천석의 뒷면. '경자년 봄에 우산(牛山)이 썼다'는 내용이다.

그림책 ≪하늘에 비는 돌, 조천석≫은 주인공 ‘나’와 동무인 ‘별도’, ‘별도’의 동생인 ‘사라’라는 어린이를 등장시켰다. 그러나 별도는 동생보다 먼저 세상을 뜬다. 사라는 오빠를 만나게 해달라며 소원을 빈다. 거기에 주인공 ‘나’도 동참한다.

삼년, 천 일 동안 산지물을 길어 물항을 채우면
그해 팔월 명절에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우리는 함께 물을 길었습니다.
사라가 항아리에 물을 붓고 내려오면 나는 돌탑에 돌멩이 하나를 얹었습니다.

- ≪하늘에 비는 돌, 조천석≫ 중에서

과연 두 어린이들의 소원은 이뤄질까. 그러나 음력 8월은 거친 달이다. 강한 태풍이 몰려와서 제주를 싹쓸이하곤 한다. 그램책도 그걸 표현했다. 커다란 보름달이 뜨는 한가위. 나와 사라가 소원 성취를 하는 날이다. 하지만 음력 8월 보름달을 기다리던 두 어린이는 태풍에 감긴다.

섬을 모조리 삼킬 듯하던 모진 바람은
큰 재앙을 남기지 않고 돌아갔습니다.
나는 돌이 되었고, 사라는 나무가 되었습니다.
사라는 금산으로, 나는 광제교 앞으로 옮겨졌습니다.
사람들은 내 가슴에 조천(朝天)이라 새겨 넣었습니다.
날마다 하늘 향해 기도를 올리는 운명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 ≪하늘에 비는 돌, 조천석≫ 중에서

조천석 진품. 제주대 박물관에 있다. 미디어제주
조천석 진품. 제주대 박물관에 있다. ⓒ미디어제주

주인공인 ‘나’ 덕분이었을까. 그림책은 음력 8월의 태풍은 ‘나’로 인해 잠잠해졌다고 말한다. 그건 희생의 결과물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림책 주인공인 ‘나’는 우리 모두일 수 있다. 누구나 소원을 빈다. 이웃을 위해, 가족을 위해…. 그렇다면 그림책의 주인공처럼 누구나 ‘조천(朝天)’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늘에 비는 돌, 조천석은 산지천 경천암 위에 우뚝 서 있으나 진품은 아니다. 현재 산지천에서 만날 수 있는 조천석은 2002년 산지천을 복원하면서 세워뒀다. 진품은 제주대박물관에 가면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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