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9 21:53 (금)
왜구에 맞서 제대로 싸우려는 장수는 왜 없는가
왜구에 맞서 제대로 싸우려는 장수는 왜 없는가
  • 김형훈 기자
  • 승인 2022.08.18 08: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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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왜변 따라잡기] <3> 싸우기 싫은 장수들

전주부윤 이윤경 제외하면 공적 찾기 힘들어

영암에서 왜구를 쫓아냈으나 막판 추격 실패

조선시대 영암군은 제주와 소통을 하던 창구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을묘왜변이 일어난 1555년은 싸움에 익숙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와의 만남이었다. 왜구는 싸움에 익숙했고, 조선은 그러지 못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만들어지고 나서, 을묘왜변과 같은 전쟁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수백 년을 평온하게 보내다 보니 전쟁을 해야 할 장수들이 도망을 가는 일도 심심치 않게 발생했다.

앞서 2차례 기획을 통해 을묘왜변을 살짝 짚었는데, 왜구들은 파죽지세로 전라도를 탐했다. 5월 11일 모습을 드러낸 왜구들은 틈을 노리다가 달량성을 함락하고, 전남 지역 곳곳을 헤집는다. ‘유린당했다’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였다.

왜구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자신들의 세력을 펼쳤다. 한데 모여 있지 않더라도 얻을 건 다 얻을 수 있었다. 그만큼 왜구가 보기에 조선은 너무 만만했다. 왜구가 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도망하기에 바빴다. 기록이 잘 설명해준다.

“적들이 장흥부를 침범했는데 성을 지키는 사람이 없어서 즉각 함락됐다. 왜구들이 마을의 살림집에 들어가 집을 불태우고 재물을 뺏는 일을 수없이 하기에 너나 할 것 없이 산골로 도망가 숨었다. 마을마다 들어온 왜구들은 겨우 3~4명이었는데도, 이들에게 대항하는 사람도 없고 바닷가의 마을을 텅 비어버렸다.” (명종실록 18권, 명종 10년 5월 30일 계해)

왜구들이 가장 먼저 접수한 달량포구는 육지에서 제주로 올 때 무척 중요한 곳이었다. 여기엔 ‘해월루’라는 누각이 있는데, 제주에 가려는 관리들은 해월루에서 바람이 잦기를 기다리곤 했다. 달량은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해남군에 속하지만 예전엔 넓게는 영암군에 포함됐다. 조선시대 영암군은 영암은 물론, 해남과 완도를 아우를 정도로 중요한 지리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18세기 영암군 지도엔 제주에 속한 추자도 역시 이 지역에 포함돼 있다. 영암은 육지와 제주를 잇는 소통창구이면서,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였음을 알게 된다.

전남 ‘영암’이라고 칭할 때 대게는 ‘월출산’을 떠올린다. 산(山)이 먼저 상상되는 곳이 영암이며, 바다와는 연관이 없어 보인다. 이렇듯 우리에게 영암은 뭍으로 인식되지만 예전 영암은 그러지 않았다. 뱃길로도 올 수 있는 지역이 영암이었다. 지금은 매립 등의 간척사업으로 영암 일대는 완연한 뭍으로 변신했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뱃길로 인력이나 물자를 한꺼번에 영암으로 옮길 수 있었다.

왜구들은 영암의 이런 지리적 특성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달량을 접수한 왜구들은 육지 곳곳을 탐하면서 뱃길로는 영암으로 진격했다. 왜구들은 영암성을 공격하기 위해 영암성 서쪽에 있는 향교를 먼저 접수한 뒤 영암읍성을 호시탐탐 노렸다.

18세기에 발간된 '해동지도' 중 영암군 모습이다. 지도 왼쪽이 남쪽이며, 오른쪽은 북쪽이다. 숫자 3이 영암읍성인데, 뱃길로 영암까지 오갈 수 있었음을 지도는 보여준다. 숫자 1은 을묘왜변 때 왜구들이 가장 먼저 점령했던 달량포구이며, 숫자 2는 영암읍성을 노려보며 왜구가 접수한 영암향교이다. 숫자 4는 추자도인데, 당시 영암군에 추자도가 포함됐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에 발간된 '해동지도' 중 영암군 모습이다. 지도 왼쪽이 남쪽이며, 오른쪽은 북쪽이다. 숫자 3이 영암읍성인데, 뱃길로 영암까지 오갈 수 있었음을 지도는 보여준다. 숫자 1은 을묘왜변 때 왜구들이 가장 먼저 점령했던 달량포구이며, 숫자 2는 영암읍성을 노려보며 왜구가 접수한 영암향교이다. 숫자 4는 추자도인데, 당시 영암군에 추자도가 포함됐음을 알 수 있다. ⓒ미디어제주

“왜적들이 영암에 와서 향교를 차지하고 있을 때, 적장인 자는 향교 성전의 위판을 모시는 교의(交倚)에 앉아 명령을 내리고, 누른 빛깔의 기를 든 선봉인 자가 그 기를 낮추었다 높였다 하여 마치 우리 군사를 부르는 것과 같은 모양을 했다. 또 칼과 창을 휘두르고 박수를 치며 소리를 지르는데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명종실록 앞의 기록)

공격을 받는 처지에 놓인 영암성은 작은 규모의 성은 아니었다. 왜구 소식을 들은 영암 주민들은 읍성으로 모여든다. 그들은 곧 관군이 와서 왜구들을 소탕해주리라 믿었다. 호조판서인 이준경을 급히 전라도순찰사로 임명하고, 좌우방어사로 김경석과 남치근을 임명했다는 소식이 영암까지 들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관군들이 온다는 소식보다는 왜구들이 떠드는 소리에 기가 꺾인 상태였다. 《해동야언》의 기록을 보면 왜구가 영암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잘 표현돼 있다.

“왜적이 영암으로 진격할 때 노약자와 사로잡은 자녀를 배에 싣고, 약탈한 붉은 칠을 한 목판을 뱃전에 나열하여 방패로 삼았다. 햇빛에 붉은 빛이 번쩍이므로 우리 군사가 멀리서 바라보고 그 위세를 두려워하는데, 팔공산초목(八公山草木)과 다를 것이 없었다.”

관군이 왜구를 소탕해주리라는 믿음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 도순찰사로 임명된 이준경은 영암으로 향하지 않고, 영암 북쪽에 있는 나주 금성관에 머물며 지휘했다. 대신 방어사로 임명된 김경석을 영암으로 내려보내 왜군과 맞서게 했다. 이준경은 왜구가 두려웠다. 《조선왕조실록》에 그 모습이 잘 드러난다. 《조선왕조실록》은 이준경을 향해 “두려워하고, 움츠리고 있고 나가지 않았다(畏縮不出)”고 평가하고 있다. ‘외축불출(畏縮不出)’이라는 네 글자는 이준경을 비롯한 당시 을묘왜변에 임했던 장수들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런데 멀리서 도움의 손길이 온다. 이준경의 친형인 이윤경이다. 이윤경은 전주부윤이었는데, 영암전투에 나선다. 이준경은 친형의 참전을 원치 않았다. 자신이 형에게 명령을 내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준경은 지휘에 문제가 있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형인 이윤경에게 영암에서 나와주라고 했으나 이윤경은 다음과 같은 말로 거부했다.

“국가의 후한 은덕을 받았으므로 마땅히 죽음으로써 보답해야 하니 의리상 나갈 수 없다.” (명종실록 18권, 명종 10년 6월 1일 갑자)

임진왜란 전후의 정치·경제·군사 문제를 연구하는 중요한 기초자료로 평가받는 《기재잡기》를 보면, 이윤경이 그럴만한 인물임을 읽을 수 있다. 전주부윤 이윤경은 덕망이 높고, 장수의 지략도 있는 인물로 평가하고 있으며, 그를 영암으로 부를 경우 왜구를 깨뜨릴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기재잡기》의 평가처럼 이윤경은 영암전투에 적극적이었다.

이윤경은 동생 이준경이 영암성으로 내려보낸 방어사와도 신경전을 벌여야 했다. 방어사로 파견된 김경석이 전투를 피하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영암읍성 발굴 현장. 미디어제주
영암읍성 발굴 현장. ⓒ미디어제주

“전주부윤 이윤경이 영암에 진을 치고 나가 싸우기를 청해도 김경석은 듣지 않았다. 이윤경이 ‘만일 패하면 혼자 죄를 받아야 한다’고 까지 말하자 김경석은 할 수 없이 나가서 싸우라고 허락하고 자신은 성안에 남았다. 군사들은 이윤경의 지시를 받고 분개하고 원망하며 싸움에 나서서 적의 머리 1백 여급을 베자, 남은 적들이 군량과 재물을 버리고 달아났다.” (명종실록 앞의 기록)

이윤경을 제외하면 왜변에 맞선 장수 가운데 ‘잘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는 드물다. 《조선왕조실록》은 이윤경의 활약에 대해 “방어하고 포획한 공은 오직 이윤경이 최고다.”고 남기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나머지 장수들을 향해서는 ‘무상(無狀)’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만큼 공적을 낸 이들이 없다는 뜻이다.

이윤경 등의 활약으로 영암 전투는 승리로 마감된다. 완벽한 승리가 아닌, 절반의 승리였다. 물러나던 왜구를 너무 쉽게 놓아줬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제주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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