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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왜변 승리 이면엔 의병의 역할 있었다
을묘왜변 승리 이면엔 의병의 역할 있었다
  • 김형훈 기자
  • 승인 2022.08.30 06: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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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왜변 따라잡기] <4> 의병을 일으킨 양달사

시묘살이하면서 군사를 모아 왜구 격퇴

실록 등의 정부기록엔 제대로 평가 안돼

현창사업회 등 그를 알리려는 작업 활발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영웅은 전설로 이름을 새기곤 한다. 전라남도 영암에 전해 내려오는 ‘장독골샘’이라는 전설의 주인공도 그렇다. ‘장독골샘’ 전설은 왜구로 인해 생겨났다. 1555년(명종 10) 발발한 을묘왜변과 연을 닿은 전설이다.

잠시 전설로 따라가 본다.

영암성 밖엔 왜구가 진을 치고 있고, 사흘간의 격전 끝에 영암성은 수천 명에 달하는 왜구에게 포위되고, 군량미마저 떨어졌다. 마실 물도 없었다. 굶주림과 갈증으로 우리 군사들의 사기는 떨어진 상태였다. 여기까지는 특별할 게 없어 보인다. 그런데 전설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기이한 사건을 포함한다. ‘장독골샘’ 전설도 기이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장독골샘 전설에 더 빠져보자.

“군사들의 동태를 살피던 양달사 장군은 군령기를 높이 들고 한번 호령한 뒤 땅을 내리찧자 신기하게도 ‘쾅’ 소리와 함께 군령기를 찍었던 자리에서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너무나 뜻밖의 광경을 바라보던 군사들은 함성을 올리며 솟아오르는 물로 갈증을 달래고, 사기가 충천하여 수많은 외적을 섬멸했다.” (영암군 홈페이지에 소개된 ‘양달사와 장독골샘’ 전설 중 일부)

이와 같은 장독골샘 전설에 한 인물이 보인다. 바로 양달사(1518~1557)라는 무관이다. 양달사는 영암군이 소개하는 7명의 인물에도 포함돼 있을 정도로 이 지역이 꼽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영암군 전설인 '양달사와 장독골샘' 전설이 흐르는 장독샘. 미디어제주
영암군 전설인 '양달사와 장독골샘' 전설이 흐르는 장독샘. ⓒ미디어제주

 

묘왜변 때 활약한 양달사에 대한 다양한 사료 가운데 《여지도서(輿地圖書)》가 있다. 《여지도서》는 1757년부터 1765년 영조 때 각 군현에서 펴낸 사료인데, 전라도 인물편에 양달사에 대한 이야기가 잘 나와 있다.

영암 출신인 양달사는 을묘왜변이 일어났을 때 자유롭게 움직일 처지가 되질 못했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죽음으로 시묘(侍墓)살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묘살이는 부모의 묘 서쪽에 움막을 짓고, 상주가 거기에 머무르는 의식이었다.

양달사는 고민에 잠겼다. 시묘살이를 하던 양달사에겐 왜구의 침범이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어서였다. 충(忠)과 효(孝)의 갈림길이기도 했다. 결국 그는 ‘충’을 택했다.

“상복을 입고 있는 몸으로 싸움터에 나가는 것이 비록 효도의 예는 아니지만 왜적 때문에 임금을 돌보지 않는 것도 옳지 않다.” (‘여지도서’ 중에서)

그는 당나라 현종 때 안록산의 반란을 거론하며, 자신이 을묘왜변에 나서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안록산의 반란이 일어나자 현종은 “하북 24군 중에 한 사람의 의로운 선비가 없다”고 탄식했는데, 양달사는 그 고사를 거론하며 상복을 입었음에도 나서야 하는 당위성을 설명했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양달사는 “화랑(花郞)을 모았다”고 나온다. 이때 화랑은 신라 때의 그것이 아니라, 광대 등을 두루 이르는 말이다. 《여지도서》엔 양달사가 화랑을 모아서 화려한 빛깔의 무늬가 있는 옷을 입고, 다같이 온갖 연극을 펼치도록 했다고 기록돼 있다. ‘온갖 연극’은 원문에는 ‘백희(百戲)’로 나오는데, 양달사가 광대 등을 불러서 그렇게 한 이유가 있었다. 다름 아닌 왜구를 향한 눈속임이었다. 연극만 하도록 한 ‘백희’를 왜구 앞에서 등장시킴으로써 우리 군사들은 아무런 대비가 돼 있지 않다는 걸 왜구들에게 보여주려는 행위이기도 했다.

양달사는 의병을 일으킨 인물이다. 영암지역은 그의 행동과 관련해 ‘조선 최초의 의병장’이라는 타이틀을 달아주고 있다. 그럼에도 역사서에는 그가 잘 조명되지 못했다. 《여지도서》는 이와 관련해 “상중에 있는 사람으로서 부끄럽게 여겨 모든 공을 원수(元帥)에게 돌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지도서》에 나오는 원수는 을묘왜변이 터지자 전라도순찰사를 맡게 된 이준경이다.

《여지도서》는 양달사를 조명하고 있음에도 당시 정부 사료엔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조차 그의 이름은 없다. 다만 을묘왜변 이후 흉흉하던 전라도의 민심은 양달사를 잊지 않고 있음을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칠언절구로 알 수 있다.

을묘왜변은 앞서 기획에서 몇 차례 지적했듯이 전쟁에 임하려는 장수들의 의지 자체가 약했다. 전라도순찰사를 맡은 이준경의 형인 이윤경만 제 역할을 했다고 평가를 받는다. 그래서인지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을묘왜변 때 제대로 싸우지 않은 장수를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방어사로 영암성을 지키면서 도로가 막히고 끊겼다는 핑계로 이웃 고을의 포위당한 성을 구원하지 않았고, 적이 가까이 왔을 때에는 즉시 나아가서 공격하지 않고 위축되어 자신을 지키기만 하였으니, 이것은 군법에서 이른바, 머뭇거리면서 진격하지 않아 군기(軍機)를 잃어 그르쳤다는 것으로 모두 참형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명종실록 19권, 명종 10년 12월 2일 임진)

양달사 시묘공원에 있는 양달사의 묘. 미디어제주
양달사 시묘공원에 있는 양달사의 묘. ⓒ미디어제주

참형해달라고 실록에 거론된 장수들은 최인, 이희손, 홍언성, 이세린, 노극정, 유사, 박민제, 김빈, 조안국, 김경석 등이다. 성을 먼저 버리고 도망간 장수, 왜구를 만나자 겁이 나서 적을 향해 활을 쏘지 못하게 한 장수, 포위를 당하자 진격을 하지 않은 장수, 적이 물러난 뒤에도 추격하지 않은 장수 등이다. 명종은 왜변 때 제대로 대응을 하지 않은 장수들을 처벌해달라고 하는 요청을 받자 “이미 죄를 내렸으니, 다시 논하지 않겠다”면서 더 이상 거론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민심은 어땠을까?

전라도의 민심은 최악이었다. 장수들을 처벌해 달라는 내용이 실린 《조선왕조실록》 그 기사엔 칠언절구가 실려 있는데, 그 시엔 을묘왜변 때 전쟁에 임하던 장수들의 문제점을 일일이 거론하고 있다. 원수 역할을 맡았던 전라도순찰사 이준경을 향해서는 “원수는 금성(나주)에서 부질없이 물러나 움츠렸다”고 말할 정도로 민심은 좋지 않았다. 다만 칠언절구는 양달사에 대한 평가는 달랐다. “공이 있는 양달사는 어디로 갔느냐(有功達泗歸何處)”며 아쉬움을 표하고 있다.

칠언절구를 좀 더 옮겨본다.

공이 있는 양달사는 어디로 가고 / 有功達泗歸何處
의리 없는 유충정이 강진에 부임했 / 無義忠貞任康津
평소 국록을 먹을 때 모두 거짓을 꾸미네 / 食祿平時皆飾僞
오늘날 위기를 당하니 문득 실상이 드러나네 / 臨危此日却見眞
멋대로 날뛰는 왜적을 누가 대적할 수 있으랴 / 橫行倭賊誰能敵
공사간에 모두 불태워 없애니 삶은 힘들고 / 焚蕩公私困生民
상벌은 법이 없어 공도가 무너지니 / 賞罰無章公道滅
실망하여 탄식하는 임금의 수치는 씻을 길 없네 / 惆悵君羞雪無因

실록은 이 시에 주를 달면서 양달사를 딱 한 번 거론한다. “양달사는 영암을 지킨 공이 있는데 발탁하지 않았다(梁達泗 有靈岩之功 而不爲擢用)”는 13자의 기록이다.

양달사는 당시 실록에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으나 각종 사료에 관련 기록이 등장한다. 호남 유생들은 수차례 양달사의 표창 상신을 요구하는데 1847년(헌종 13)에 와서 좌승지로 추증된다.

조선시대엔 유생들이 양달사의 업적을 알리려 했다면, 현대에 들어서는 그의 공적을 직접적으로 새기는 일련의 일이 일어난다. ‘장독골샘’ 전설을 담은 샘을 정비하고, 거기에 양달사 공적비가 세워진다. 영암군은 아울러 시묘살이를 했던 터를 ‘양달사 시묘공원’으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다. 지난 2019년 ‘양달사현창사업회’가 만들어지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조명받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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